주형직 을지대 교목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책상 뒤로 커다란 창문이 있다. 일을 하다 피곤하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계절에 따라 다른 풍경이 연출되지만 요즘엔 주로 하늘을 본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아 아쉽긴 하지만 하늘을 볼 때 가장 겸손한 마음이 된다.

창은 안과 밖을 구별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바라보거나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안과 밖을 연결하기도 한다. 사무실 창을 통해선 주로 바깥을 보지만 창을 통해 사무실 내부가 반사되기도 한다. 바깥에 어둠이 내려 어두워졌을 때다. 내부는 형광등 빛에 환하지만 어둠이 내렸을 때 창을 바라보면 바깥 풍경이 아니라 내 자신의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돼 나타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내 모습을 마주할 때가 언제일까. 자기 모습을 마주할 땐 미래가 어둡다고 느껴질 때다. 내일을 기대하기 어렵고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질 때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럴 때는 염려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자신과 대면해야 한다. 걱정스런 눈으로 자기 모습을 보는 건 불편하지만 솔직하게 대면해야만 다시 내일을 전망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내일을 꿈꾸며 삶의 초점을 내일에 맞춘다. 오늘은 현실이지만 내일은 꿈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른 날이 아님에도 내일을 위해 기꺼이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꿈꾸기만 한다면 오늘의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자꾸 방향을 놓치는 건 그 때문이다. 길을 잃어 방황하고 있다면 바라보기보다 안팎을 비추는 창을 입김불어 맑게 닦을 일이다.

사람들은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나게 되면 “왜 하필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 탄식한다. 그리곤 자신 때문이 아니라 주변 상황이나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로 애써 핑계하며 원망하는 마음부터 갖는다. 불행의 원인을 타인이나 주변 상황에 돌리고 원망하는 것으로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탓을 하면서 원망의 크기를 키우면 원망은 곧잘 분노로 이어진다.

명절연휴 많은 지인들로부터 휴대폰 문자가 왔다. 주로 행복하고 건강하라는 덕담이다. 참 감사한 말이지만 행복하고 좋은 일만 생길 순 없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사실 자신에게 나쁘거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어느 때든 원하지 않는 일이 나에게 생길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바람직하다.

삶이란 좋은 일과 나쁜 일,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설켜 지어내는 한 조각 옷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어느 한쪽만으로 옷감이 될 수 없듯이 좋은 일과 행복으로만 지어진 옷감은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나쁜 일과 불행만으로 지어진 옷감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하늘에 천사가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 주겠다고 했다. 사람들은 부푼 기대와 기쁜 마음으로 천사 앞에 하나, 둘씩 모이게 됐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천사는 ‘행복의 바구니’와 ‘불행의 바구니’를 각각 한 개씩 나누어줬다. 사람들은 행복의 바구니는 기쁘게 받았지만 불행의 바구니는 받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천사에게 항의했다. “행복을 나눠주겠다고 해놓고 왜 불행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행복과 불행은 서로 한 세트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랍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신다면 불행의 바구니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라지만 불행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나에게 좋은 일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불행이다.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되 나를 버릴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도 가져야 한다. 만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이는 상황이라면 자신을 만나야 한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내 안에 내 어려운 현실을 넘어설 길이 있다. 그 길을 발견할 때 비로소 내가 아닌 세상이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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