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재 3.8 민중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


증언의 얼굴 

                     - 김용재  -

천둥하는 몸짓 출렁였다 
가슴 터지는 아우성 드높았다 

1960년 3월 8일 
민주의 목숨을 위해 
자유의 광명을 찾아 
파도처럼, 대전의 학생의거 
양양했다-우뚝했다 

무지한 총부리도 
비겁한 방망이도 
못난 바리게이트도 
모두 기세를 잃고 
정의의 깃발로 올린 
역사의 불꽃 진실로 뜨거웠다 

시대의 검은 장막을 뚫고 
저 눈부신 하늘 향해 
증언의 얼굴로 탑이 서다 

대전 서구 둔산동 둔지미공원에 우뚝 서 있는 3‧8민주의거기념탑에는 그날을 기억하는 시 ‘증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시인은 잊지 못할 그날을 가슴으로 쓴 시가 민중의 가슴에 새겨지길 바랐다. 시를 쓴 장본인은 현재 3‧8민중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김용재(사진·75) 씨. 그는 “4‧19혁명에 관한 700여 편의 시를 모두 다 읽고 쓴 시”라며 그날을 오롯이 시로 표현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털어놓았다. 이어 “4‧19의 초석인 2‧28대구민주화운동, 3‧15의거 등에 비해 대전에서 일어난 3‧8민주의거가 주목받지 못하지만 기념 시에 있어선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시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날의 기억 역시 그의 자부심이다. 지금이랑 학제가 달라 4월 1일이 신학기가 시작되던 때인 1960년 3월 8일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그는 그날의 일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김 의장은 “2학년 형들이 주축이 돼서 간부였고 당시 나는 1학년으로 그저 대모대에 앞서서 나선 사람 중 하나였다”며 “당시 사회는 학생들인 우리가 봐도 이상했다. 부정선거를 하기 위해 삼삼오오 조 편성을 해 선거를 하도록 했고 고무신, 비누 등 각종 용품을 선물로 돌렸다.

또 학교 선생님들은 선거운동원으로 동원돼 가정방문을 했다”고 민주의거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이어 “당시에는 서울신문이 관보나 마찬가지였는데 학급비로 충당해서 학급마다 한 부씩 보게 했고 사복경찰이 투입돼 감시를 했었다”라며 “학생들 눈에도 아주 노골적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자유를 달라’, ‘부정선거를 규탄한다’를 골자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대전 지역 고등학생들이 결집해 만들어낸 운동이지만 결과적으로 대전고등학교 학생들만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 의장은 “대구에서 2‧28이 일어난 이후 대전에서는 학생연합에서 대대적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보문고등학교의 한 하숙집에 모여 모의를 했었다”며 “3월 8일 공설운동장에서 야당유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날로 결의를 했는데 정보가 누설 돼서 봉쇄를 당했다. 보문고등학교며 공업학교며 갑자기 학기말 시험이 급조됐고, 당일에는 경찰관들이 학교를 둘러싸 버려서 참여할 수가 없었다”고 기억했다. 

물론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기까지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일을 주도적으로 도모한 학생 간부 20여 명이 교장 관사로 전부 소환됐다. 담을 뛰어넘으며 “나가자”고 소리친 용기 있는 행동을 한 당시 규율부장(최정일 씨) 덕분에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규율부장의 외침에 각 반 대표들도 나가자고 소리를 쳤고 갇혀있던 간부들까지 공설운동장으로 진군했다. 
김 의장은 “당시 문창동이 전부 논바닥이었는데 논바닥 가운데 인분을 가둬놓은 데가 있다.

그 통에 막 빠지고 엉키고, 모자가 벗겨지고 옷이 찢기고 신발이 벗겨지는 등 아비규환이었다”고 생생히 증언했다. 그는 당시 큰 부상을 입진 않았지만 최근 팔 한 쪽에서 뼛조각이 따로 떨어져 살에 박혀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김 의장은 당시 팔뚝을 맞았던 기억과 상처가 연결됐다고 했다. 특히 당시 귀를 방망이를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 불구가 된 이도 있을 만큼 상황은 처참했다. 학생들 앞에서 폭력을 저지하던 선생님들이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김 의장은 “우리들 앞에서 학생들을 때리지 말라고 호소하던 금종철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조남호 선생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를 선동했다고 오해를 받아 어려움을 겪으시기도 했다”며 “그래도 당시 선생님들이 많은 의지가 됐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군사정부시절까진 이날을 기념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김 의장은 “1990년도 중반부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2000년에 시작됐는데 우리도 그때 대전고등학교에서 기념식을 갖고 시작했다”며 “어려움은 많았지만 앞으로 더 해야 할 일이 더 많다”고 말했다. 

고희를 훌쩍 넘긴 지 오래지만 그는 아직도 하는 일이 많다. 현재 3‧8민중의거기념사업회 공동의장이지만 시인이자 문학박사고,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과 국제PEN(펜)한국본부 부이사장을 역임하면서 3‧8민주의거와 떼놓을 수 없는 대전충남‧419혁명동지회 회장도 겸임 중이다. 

김 의장은 “3‧8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법률로 승인한 법률승인단체”라며 “우리 지역에서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 세대가 기억해야 한다. 대전3‧8의거도 국가기념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사업회는 3‧8민주의거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날의 기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선 어떠한 활동보다 국가기념일 선포가 최선이라는 선택에서다. 이 같은 노력은 빛을 보기 시작해 지난해 12월 1일 ‘3‧8민주의거 기념일’ 국가기념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김 의장은 “지난 1월 대구2‧28민주화운동이 국가기념일로 선포됐기 때문에 그 뜻을 같이하고 있는 우리 3‧8민주의거기념일도 곧 선포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국가에서 관심을 갖고 3‧8도 기념일로 지정하고, 기념공원 등이 갖춰져야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글·사진=강선영 기자 kkang@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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