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봉 시인·전 대전문인협회장

▲ 문희봉

연애 시절이나 신혼 때와 같은 달콤함만을 바라고 있는 남녀에게 우리 속담은 ‘첫 사랑 삼 년은 개도 산다’라고 충고한다. 사람의 사랑이 개의 사랑과 달라지는 것은 결국 삼 년이 지나고부터인데 우리의 속담은 기나긴 자기수행과 같은 그 고난의 과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열 살 줄은 멋모르고 살고, 스무 살 줄은 아기자기하게 살고, 서른 살 줄은 눈코 뜰 새 없이 살고, 마흔 살 줄은 서로 못 버려서 살고, 쉰 살 줄은 서로가 가여워서 살고, 예순 살 줄은 서로 고마워서 살고, 일흔 살 줄은 등 긁어주는 맛에 산다’라고 말이다. 이렇게 철모르는 시절부터 남녀가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살아가는 인생길을 이처럼 정확하고 실감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자식 기르느라 정신없다가 오십 줄에 들어서서야 지지고 볶으며 소 닭 보듯이, 닭 소 보듯이 지내다가 그마저도 지나쳐 버리기 일쑤이니 말이다. 원수같이 생각했는데 어느 날 머리칼이 희끗희끗해진 걸 보니 아내가 불현듯 가여워진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서로 굽은 등을 내보일 때쯤이면 철없고 무심했던 지난날을 용케 견디어준 서로가 눈물 나게 고맙다고 생각한다. 이젠 이 세상 소풍 접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쭈글쭈글해진 등을 서로 긁어주고 있노라니 팽팽했던 피부로도 알 수 없었던 남녀의 사랑이기보다 평화로운 슬픔이랄까, 자비심이랄까 그런 것들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바람 부는 날이면 가슴 시리게 달려가고,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미친 듯이 가슴이 먼저 빗속의 어딘가를 향해서 달려간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함께 늙어 버리는 줄 알았는데 겨울의 스산한 바람에도 온몸엔 소름이 돋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육체는 그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늙어가지만 시간을 초월한 내면의 정신은 새로운 가지처럼 어디엔가로 새로운 외면의 세계를 향해서 자꾸자꾸 뻗어 오르고 싶어 한다.

나이를 말하고 싶지 않은 나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나이, 체념도 포기도 안 되는 나이. 나라는 존재가 적당히 무시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와버렸다. 피하에 축적되어 불룩 튀어나온 지방질과 머릿속에 정체되어 새로워지지 않는 낡은 지성은 나를 점점 더 무기력하게 하고, 체념하자니 지나간 날이 너무 허망하고, 포기하자니 내 남은 날이 싫다 투정한다.

하던 일 접어두고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것을,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삶에 대한 느낌은 더욱 진하게 가슴에 와 머무른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도 꿈을 먹고 살거나 추억을 먹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무지 빛깔도 형체도 알 수 없는 색깔이 나를 물들이고, 갈수록 내 안의 숨겨진 욕망의 파도는 더욱 거센 물살을 일으키고 있다. 처참히 부서져 깨어질 줄 알면서도 여전히 바람의 유혹엔 더 없이 무력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건 잘 훈련 되어진 정숙함을 가장한 완전한 삶의 자세이기에 그럴 것 같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도, 더없이 푸른 하늘도, 회색 빛 높이 떠 흘러가는 쪽빛 구름도, 창가에 투명하게 비치는 햇살도,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코끝의 라일락 향기도, 그 모두가 다 내가 품어야 할 유혹임을 안다. 끝없는 내 마음의 반란임을 창가에 서서 홀로 즐겨 마시던 커피도 이젠 누군가를 필요로 하면서 같이 마시고 싶어진다. 늘 즐겨 듣던 음악도 그 누군가와 함께 듣고 싶어진다.

친구가 그리워지고 친구를 만나고픈 그런 나이가 되었나 보다. 사소한 것까지도 그리움이 되고, 아쉬움이 되는 거, 결코 어떤 것에도 만족과 머무름으로 남을 수 없는 것이 슬픔으로 남는 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나는 꿈을 먹고 사는 게 아니라, 꿈을 만들면서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내 진심으로 사랑을 하면서 멋을 낼 수 있는 그런 나이로 진정 살고 싶다.

칠십대란 고희가 아니라 신중년의 시기이고, 아름다운 바람(願)이고, 더욱 더 비상하고자 하는 나이 먹은 새의 파닥거림이라 생각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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