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꽃이피는 신화 4편

◆나르키소스(Narcissus)

꽃보다 곱게 태어난 사랑스런 나르키소스는 시간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졌다. 자신의 매력을 사방으로 뿜어내면서도 정작 본인에 대한 관심을 귀찮아하는, 다 가진 자였다. 예뻐도 예쁜 척 하는 종자들은 영 예뻐 보이지 않아서다. 도도함과 시크함은 미인, 미남의 또 다른 조건이지 않을까.

나르키소스를 사랑한 사람들은 다양했다. 같은 마을의 청년 아메이니아스(Ameinias)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다. 그 마음을 숨길 수 없어 고백했지만 나르키소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의 관계마저 끊어버렸다. 아메이니아스는 상사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날 나르키소스의 칼을 뽑아 그의 앞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거뒀다. 그녀에게 보낸 나름의 복수였고, 저주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났다.

이제 인간을 넘어 요정들도 그를 사랑하게 됐다. 저주를 받아 남의 말만 무한 반복하던 에코(Echo)는 숲의 요정이었다. 그날도 금빛 물결치는 머리를 휘날리며 사냥하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반해 맘먹고 다가가 고백하고 싶었지만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말 한마디 못하고 나르키소스 주변을 얼쩡거렸는데 그는 고개한번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지쳐버린 에코는 산 속 깊이 숨어 버렸고 사랑을 모르는 얼음 같은 나르키소스를 저주했다.

사랑의 감정을 비웃듯 번번이 피하는 나르키소스를 벌하기 위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직접 나섰다. 간절한 기원을 갚아주듯 그를 징벌했다. 잘생긴 게 죄라니, 나르키소스도 참 억울했겠다. 그렇게 치면 나는 무죄인가.

어느 날 아침 늘 그랬듯 사냥에 나선 나르키소스는 목이 말라 샘물을 찾아갔다. 그러나 물을 마시려는 순간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과 마주하게 됐다. 바로 ‘자신’이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모습에 도저히 물을 마실 수도,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끝없이 우물가에 앉아있었다. 한참을 보다가 귀한 그 얼굴, 한번이라도 만져보려 손을 댔다. 그러자 잔물결이 일며 아름다운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안 돼, 가지마! 보고 싶어. 가지마! 나도 여기 있잖아.”

물속에 그는 말이 없고 절망적인 얼굴을 할수록 물속 사람도 슬퍼했다. 이러느니 차라리 물속에 들어가 한번이라도 만나보겠다는 마음으로 힘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름다운 한 송이의 귀한 꽃이 피었다. 수선화였다.

◆나르시시즘(Narcissism)

정신분석학적 용어로 자기애가 과한 경우를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병적으로 사랑하는 증세를 말한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다. 사실은 닮는 게 아니다.

‘어느 날 운명처럼 누군가를 만난다. 마치 전생에 본 듯한 그였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거울에서 평생을 봤던 한 사람의 잔상이 기억에 남아 그 사람과 비슷한 사람이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눈길이 간다고 했다.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과 닮은꼴을 운명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부는 닮아있는 채로 만나게 된다. 가끔 사진을 찍다가 셀카 버전으로 바뀌어 버리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귀신을 본다고 이렇게 놀랐을까. 나를 보고 그렇게 정색할 건 뭔지. 원판불변의 법칙인 사진이 그렇게 나의 진짜모습을 말해줘도 오늘도 인정하지 못하고 현대 카메라도 잡아내지 못하는 나의 숨겨진 미모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나를 사랑해야겠다.

수선화를 사랑하는 또 한분의 어른이 계셨다. 바로 추사 김정희다. 사람 대하듯 꽃을 아끼셔서 제자들도 스승 모시듯 가꾸었단다. 그도 그럴 게 천리 길 제주 애월로 귀양을 떠나 갖은 고생을 할 적에 그 표정 항상 곱게 추사를 바라보는 이 ‘수선화’였단다.

 

한 점의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

(一點冬心朶朶圓)

그윽하고 담담한 기품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

(品於幽澹冷雋邊)

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梅高猶未離庭砌)

맑은 물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

(淸水眞看解脫仙)

 

애월읍 추사기념관에는 수선화가 그의 앞에 항상 피어있다. 조화라는 게 깊은 슬픔이다. 조화를 꽂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에디뜨피아쁘(Edith Piaf) 50주기를 기념해 그의 무덤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한겨울 커피도 얼어버렸던 그날, 그녀의 무덤에는 붉은 꽃다발이 생생했다. 누가 가져다 놓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시들은 꽃은 없었다.

◆메아리의 에코

헬리콘(Helicon) 산의 요정 에코는 발랄하고 귀여웠다. 모든 게 신기해 종일토록 종알종알 떠들었다.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캐릭터였다.

하지만 말이 너무 많았다. 바람의 전사 제우스(Zeus)가 산에 내려섰다. 아무래도 눈에 담아둔 여인이 있는 것 같았다. 헤라(Hera)는 이를 일찍 알아챘고 급히 따라나섰다. 헬리콘 산 어디쯤인지를 천부적인 감각으로 찾아나서야 하는 순간, 헤라 여신을 처음 본 에코는 졸졸 따라다니면서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헤라는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정신 사나워 끝내 제우스의 꼬리를 놓치고 말았다. 불같이 화가 난 헤라는 에코를 저주했다. “네 이년. 내 남편이 시키드냐? 뚫린 항아리같이 말이 쏟아지는구나. 이제 다시는 너는 먼저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의 말끝을 끝없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말하는 낙으로 살던 에코는 말을 잃게 됐다. 어느 날 물가로 찾아 온 한 청년을 볼 때까지 에코는 자신에게 내린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전할수도 없었다. 심지어 묻는 말에 끝없이 상대방 말을 따라했으니 상대방은 놀린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다가갔으나 정작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물그림자에 빠져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 말 한마디도 못해보고 에코는 그렇게 시름시름 앓아누웠다. 그러다 동굴 속에 들어가 나오지도, 먹지도 않고 긴 세월을 머물렀다. 몸도,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 목소리만 남게 됐다.

그래서 산에 가면 지금도 자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대답을 해주고 있다. 대답 없던 그를 생각하니 외로워서였다. 에코는 그렇게 메아리가 됐다.

글·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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