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의 땅 베르기나

필리포스 2(Philippos II)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트로이(Troy)와 베르기나(Vergina)였다. 트로이는 호메로스(Homeros)일리아드(Illiad)’라는 책을 연구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이 터키 이즈미르(Izmir)에서 찾아낸 전설의 유적이었다.

또 하나는 알렉산드로스(Alexandros)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 무덤이다. 1977년 발견된 무덤은 처녀분이었다.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데 마케도니아(Macedonia)가 그리스를 정복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에 있었다. 기가 막혔다. 베르기나 너른 벌판에 집이 몇 채 있는 것 같더니 천마총 같은 고분에 입구가 두 개 있었다. 밖에서는 정말 천마총 같았다. 별 기대 없이 쏙 들어갔더니 그 안에 무덤만 네 개가 있고 그 안에서 나온 유물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유홍준 교수의 책에는 전 세계 금관이 총 9개인데 그 중 7개가 한반도에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나는 베르기나에서만 네 개의 금관을,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서 또 다섯 개를 봤다. 도토리가 달려있는 참나무 관은 탐스러웠다. 잎사귀도 풍성한 금관은 11kg의 금 상자위에 올려져있었다.

전시관 입구는 소박한데 안은 하데스의 지하궁전 같았다. 진품유물이 그렇게 흔하게 펼쳐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필리포스 2세의 무덤을 비롯한 마케도니아 왕과 그 가족무덤이 입구까지 들어서 있었다. 지하신전이라고 할 만한 스케일의 건축물은 색을 입고 벽화 또한 찬란했다. 은으로 만든 그릇 세트, 동으로 만든 무기, 철기, 장식품 등 한눈에 담지 못했다. 이런 감동과 만난 날 정말 살아서 감사하고 알아서 기쁘다. 사진금지라 한 장의 사진도 없지만 아무 상관없다.

트로이는 어땠을까. 언젠가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욕 나왔다. 베르기나여, 영원하라.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를 안 듣고 세계사를 지날 수 있을까. 어느 시점에 어디서 살았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를 알고 있다. 지극히 유럽 사람처럼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엄밀히 말하면 페르시아(Persian)인에 가깝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라이름 마케도니아가 아니라 고대그리스 북부에 있었던 곳의 이름이다. 그리스에서는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관대한 그리스인이 그들을 그리스인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유는 있다. 일단 언어가 달랐을 것이고 룰이 달랐을 것이다. 게다가 종교도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리는 알렉산드로스를 당연히 서양 사람으로 인식하며 그의 동방원정을 아시아와 유럽의 첫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그리스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들은 일단 올림픽에 초대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고 언어가 달랐다. 가장 큰 이유는 장례방식이 달랐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는 화장을, 그리스는 매장을 했다. 무덤제도는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다.

가장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제도가 무덤제도였기에 고대국가의 범위를 무덤에서 찾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알렉산드로스의 국적을 그리스에 둔다. 1977년 필리포스 2세 무덤 발굴이후 더욱 강화돼 알렉산드로스는 온전한 그리스인이 됐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럽이 아시아를 굴복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왜냐면 17세기가 될 때까지 이렇다 할 아시아 정복 이슈가 없어서다. 실제로 근대까지 아시아가 유럽보다 강성했다는 증거는 많다. 이 때문에 유럽사가 유럽중심으로 완성되기 위해서 반드시 알렉산드로스가 필요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인가, 그리스인이어야만 했는가. 잘은 모르겠으나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는 신화만큼이나 신화적인 사람임은 분명했다.

·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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