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로 본 충남 역사 문화] ‘설천선생충노기적비(雪川先生忠奴紀蹟碑)’에 얽힌 사연
[유물로 본 충남 역사 문화] ‘설천선생충노기적비(雪川先生忠奴紀蹟碑)’에 얽힌 사연
  • 금강일보
  • 승인 2018.06.11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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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연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부여군 임천면 소재 ‘설천선생충노기적비(雪川先生忠奴紀蹟碑)’

지난 회에 소개한 ‘권각충신정려’와 같이, 일반적으로 ‘정려’라 하면 충‧효‧열의 삼강정려(三綱旌閭)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흔치 않은 예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남녀 종을 기리는 정려가 있는데, 바로 충노(忠奴)‧충비(忠俾)정려이다.

필자가 향토사학자 이진현, 김삼현 선생의 소개로 찾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의 전주이씨가 ‘설천선생충노기적비’도 그 하나이다. 이 충노비는 1861년 설천 이봉상(李鳳祥)의 현손 이용은(李容殷)이 비문을 지어 건립하였다. 좌측에는 나란히 이이명(李頤命)의 아들 이기지(李器之)의 충절을 기리는 ‘충신일암선생기지정려비(忠臣一庵李先生器之旌閭)’와 이봉상의 처 온양정씨의 정열을 기리는 ‘열녀숙인온양정씨정려비(烈女淑人溫陽鄭氏旌閭碑)’가 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정려비가 한 각(閣) 안에 있어 ‘양세충열정려기(兩世忠烈旌閭記)’라는 제호로 기문이 걸려 있다. 충노비 역시 각으로 보호되고 있다. 

이 충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는 신임사화(辛壬士禍)와 관련이 있다. 신임사화는 경종 즉위 후 연잉군(훗날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과 이를 역모로 간주한 소론 사이의 갈등으로 벌어진 사화이다. 이때 김창집‧이건명‧조태채와 함께 노론 4대신 중 한 명이었던 이이명이 사사되고, 그의 아들 이기지도 처형되었으나, 당시 16세였던 이봉상은 이이명의 처 광산김씨가 후사를 위해 피신시켜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 이봉상의 도주를 위해 대신 죽은 사내종이 이 충노비의 주인공이다. 이 이름 없는 사내종은 이봉상의 유모의 아들로, 그 죽음은 이봉상의 생존과 함께 비밀에 부쳐졌다가 1725년 영조가 이이명을 복작시킨 후, 광산김씨의 진술을 통해 전말이 드러났다. 


“마침 가동(家僮) 가운데 나이와 용모가 이봉상과 비슷한 아이가 있었으므로 신이 대신 죽어줄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더니, 그 가동이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사양하지 않고 강에 몸을 던져 죽어서 이봉상을 도망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동의 시체를 염하고 관에 넣어 관부의 부검을 거친 다음 무덤을 쓰고 신주를 만들었습니다. 이봉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떠난 뒤에 소식이 없어 몰랐는데, 금년 2월에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찾아서 자수하게 하려고 하였었습니다.” (『영조실록』1725년 5월 9일, 광산김씨 상언 중에서) 

영조는 이 일을 가상하게 여겨 이봉상을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하고, 주인을 대신해 목숨을 바친 가동에 대해서는 전례를 상고하여 포상하라고 명하였다. 사관은 충노의 희생을 ‘만고에 우뚝 솟은 절개’로 평하였고, 이용은은 비문에 ‘견위수명(見危授命), 손생보주(損生保主)’라 새기고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대의를 위해, 또는 지키고자 하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고결한 자기희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내종의 죽음에 대해 시대유감(時代遺憾)을 떨칠 수 없는 것은, 역사는 재해석되고 사건은 재평가되기 때문이다. 장을연(충남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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