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신 한남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정신 교수

몽골은 고려를 항복시킨 후에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는 일환으로 일본 공략을 결정했다. 이러한 일본원정에는 몽골의 강요로 인해 고려도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은 1266년(원종 7)부터 고려에 사절을 파견, 그들을 일본으로 향도해 줄것을 요구했으며 1271년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하고 막대한 양의 군량과 군선을 준비하게 했다.

1차 여몽연합군의 규모는 도원수 흔도, 부원수 홍다구 지휘하의 몽한군 2만 5000명, 고려도독사 김방경 휘하의 고려군 8000명, 뱃사공 6700명, 군선 900척 등이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 10월 3일 여몽연합군은 합포(마산)를 출발해 대마도(5일)를 공략하고 일기도(14일)를 거쳐 18일에 하카다에 도달한 뒤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여원연합군의 일본침입으로 후쿠오카는 완전히 초토화됐다. 이 정도라면 일본을 위협하려 했던 원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판단한 흔도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폭풍우를 만나 배에 주둔하던 연합군 1만 3500명이 물에 빠져 죽게 된다.

1281년 2차 원정에서 쿠빌라이는 일본을 영구 점령하기 위해 군선에 농기구 종자를 싣고 출발하게 했다. 이때 고려는 군사 1만 명, 군선 900척, 뱃사공 1만 5000명, 군량미 11만 석 등을 부담했으며 몽골에서는 몽한군 3만, 남송의 투항병을 주축으로 한 강남군 10만, 군선 3,500척으로 출발했다. 이미 정벌당한 경험이 있던 일본은 이마진에서 카시이에 이르는 석벽(원구방벽)을 쌓아 대비하면서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이때 불어닥친 태풍으로 많은 배가 부서짐으로서 10여만 명의 강남군은 미처 배를 타지 못해 전의를 상실하고 산속에 숨어있다가 일본군에 잡혀 죽음으로서 여몽연합군의 2차 원정도 실패로 끝났다.

외세침략이라는 국가존망의 위기를 벗어난 일본정부는 신국사상을 고양시켰다. 신이 보호하는 일본은 강대국인 몽골마저도 제압하지 못함을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 지금도 후쿠오카에는 원구방벽, 몽골총 등 몽골과의 전쟁에 관한 많은 유물이 남아있다. 이 유물들은 주로 청일전쟁 이후 만주사변에 이르는 시기에 재정비되는데 특히 1920~30년대 일본경찰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일본은 조선을 거쳐 만주,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목표를 정하고 그 과정에서 과거 몽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전하며 주민들을 독려해 전쟁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미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상 조선은 더 이상 그들의 적수가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입에서 고려군의 수가 적지 않았음에도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고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고려를 몽골 하수인의 위치에서 끌어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중국이었던 것이다.

일본 후쿠오카의 동공원에는 원구사료관(元寇史料館)이 있다. 원구사료관은 1904년에 원구기념관으로 만들어졌다가 1986년 새롭게 원구사료관으로 개관했다. 이곳은 몽골 침입기에 노획한 몽골 군인의 갑옷과 철모, 그리고 무기가 전시돼 있다. 또 몽골의 일본공격에 관한 그림이 채워져 있는데 이는 모두 메이지유신 이후 그려진 것이다. 여기 덧붙여서 전시돼 있는 것은 청일전쟁 때 노획한 청 군인들의 물품이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옛 원나라 침략을 막아낸 것과 비교함으로서 일본인을 고양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몽골 방어에 노력했던 승려 일련의 동상은 1904년부터 일련종도(日蓮宗徒)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모금을 벌여 17년 후 동공원에 세워졌다. 원구사료관과 일련의 동상을 통해 일본 군부는 신풍이 불어 원군이 패배시킴으로서 일본이 신의 나라임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또 신풍과 더불어 국내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결속력이 일본침략을 저지하는 주 원인임을 강조했다. 일본 군부는 신국사상을 극대화해 마침내 황국사관으로 귀결시켰다. 일본은 그러한 국제정세에 편승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1년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다. 전후(戰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본은 이같은 사상적 경향이 뿌리깊게 강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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