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코린토스 신화 1편

글라우케의 샘

이아손보다 더 유명한 부인 메데이아였다. 사랑이 뭔지. 사랑에 영혼까지 바친 한 여인의 막장드라마였다. 역사에선 악인이 필요했다. 성경에는 가롯 유다가 있고 로마엔 브루투스가 있다. 악인은 한 짓보다 더 많은 것이 덧붙여져 진정한 나쁜 놈으로 부각된다. 역사가 줘야하는 교훈적인 이야기 중 비극이 주는 효과는 컸다.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악인들의 죄가 시간이 가며 더 많아졌다. 악인이 등장하면 주인공은 더욱 빛났다. 그리고 주인공은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높은 곳으로 인도됐다.

인덕 많은 이아손은 아르고스 원정대를 끌고 콜키스에 들어왔다. 첫눈에 반한 건 공주 메데이아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의 공주는 상당히 재주가 많았다. 이아손은 콜키스의 보물인 황금양털을 가지러 왔다고 했다. 그러다 콜키스의 왕은 이아손에게 불을 뿜는 소를 길들여 밭을 갈고 용의 이빨을 그 땅에 뿌리라 했다. 차라리 안 준다고 하지, 미션을 내려 줄 건 뭔가.

아니다. 사실 소유권이 콜키스에 있는데 달라고 쫓아온, 그것도 최강의 군인들이 달고 시위하듯 다가온 아르고스 원정대는 깡패나 다름없었다. 시각이 이아손에 맞춰있기에 종종 잊게 만드는 선과 악이었다. 그러나 미션은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공주 메데이아는 수면제를 만들어 아레스 숲의 용에게 먹였고 그 틈에 황금양털을 들고 나올 수 있었다. 배에 타고 이제 그리스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아르고스호는 이름만 쾌속선일 뿐 속도를 내기엔 거대했다. 한명이라도 내려서 무게를 줄여야하는 판에 메데이아는 동생 압시르토스를 태웠다. 끔찍하게 귀한 막내 동생을 챙기려는 것일까. 아니었다. 아버지의 배가 추격해오자 더 이상 배가 속도를 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곤 왕자를 죽여 여섯 토막을 내서 바다에 하나씩 던져졌다. 기함할 상황에 아버지 아이에스테는 하나밖에 없는 왕자의 시체를 건지느라 더 이상 따라붙지 못했다. 메데이아의 악행이 사실이라면 최악이다. 이렇게 그리스에 도착할 쯤 이아손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숙부인 펠리아스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아손이 콜키스에서 용과 맞서다가 죽었다고 말하자 실망해서 죽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도 숙부 펠리아스에게 황금양털을 주며 이제 왕권을 돌려달라고 하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은 안 바뀐다. 이런 놈들 하고는 약속도 말았어야 하는데 이미 갈 때까지 가고 말았다.

또 나선 게 메데이아다. 펠리아스의 딸들을 불러 놓고 아버지가 나이가 많으니 젊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선 늙은 숫양을 잘게 썰어서 솥에 넣고 약초와 함께 삶아 뚜껑을 열어보니 젊은 양이 튀어나오는걸 보여줬다. 딸들은 똑같이 아버지를 약초와 삶았고 아버지는 그렇게 죽고 말았다. 왕의 자리가 비었으나 잔인한 메데이아를 왕비로 받아들일 수 없다하며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로 망명했다.

코린토스의 왕은 이아손에 반해 자신의 딸과 결혼하면 코린토스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메데이아에게 질려버린 이아손은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해 정착하고 싶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메데이아는 새 신부에게 웨딩드레스를 선물했다. 결혼식 날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레스에는 독약이 묻어있었고 살을 파고들어가며 불타는 듯한 고통을 줬다. 딸을 살리려고 부둥켜안았다가 크레온 왕도 죽고 말았다. 이 끔찍한 상황에 메데이아는 마지막 선물을 이아손에게 보냈다. 죽인 자신의 아들 메르메로스와 페레스였다.

이때 불쌍한 글라우케를 물속에 넣어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신들이 선물한 샘이 글라우케의 샘이었다.

메데이아는 그길로 나가 아테네 아이게우스왕의 부인이 되었다. 메도스라는 아들도 낳았다. 그때 때마침 테세우스가 아버지 아이게우스를 찾아왔다. 메데이아는 테세우스를 죽여야 했다. 독약을 탄 음식을 먹이려는데 낯선 남자의 칼과 샌들을 보며 아이네우스가 아들 테세우스를 알아보았다. 계획이 탄로 난 메데이아는 아들을 데리고 콜키스로 돌아갔다. 메도스는 콜키스의 왕이 됐다. 메데이아는 죽지 않고 천국 엘레시온으로 가서 아킬레우스의 부인이 됐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그녀와 그리스 안에 모종의 계약과 미션수행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뭘까.

페이레네의 샘

강의 신 아소포스의 딸을 제우스가 납치해 겁탈했다. 딸을 찾느라 미쳐 버릴 것 같은 강의 신은 딸이 어딨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물이 넘치는 샘을 받는 조건으로 시시포스는 아이오네가 잡혀간 오이노네 섬을 알려줬다.

아소포스는 제우스가 신의 왕인 것도 잊고 당장에 오이노네 섬으로 쫓아가는데 제우스는 간단하게 벼락을 던져 물속으로 처박아 버렸다. 그때부터 아소포스 강 바닥에는 석탄이 나온다고 한다.

고자질로 얻은 선물이 지금도 콸콸콸 흐르고 있는 페이레네 샘이다. 신기하게 우물도 아니고 관계수로로 연결한 수맥이다. 아직도 그 물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단다.

한참 사랑에 빠진 제우스를 밀고한 죄로 시시포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저승사자 타나토스를 시켜 지하로 끌고 가라고 시킨 것이다. 보통 벌은 줘도 단박에 죽이지는 않는데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번엔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시시포스는 타나토스를 유인해서 골방에 묶어두었다. 그때부터 죽어야하는 생명들이 죽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목이 잘린 닭이 뛰어다니고 숨이 끓어진 노파가 웃으며 일어났다. 토막을 낸 생선이 헤엄치고 창 맞은 병사가 다시 싸우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제우스는 급하게 아레스를 시켜 타나토스를 구출하는 작전을 펼쳐야했다. 시시포스는 신의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놈이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죽음을 시기고 신을 농락한 인물이었다.

약지 않으면 살수 없었던 코린토스의 운명을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했나보다. 이렇게 시시포스의 희생(?)을 척박한 코린토스에는 물줄기 소리도 찬란한 페이레네의 샘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김기옥 님(협동조합 사유담(史遊談))

정리=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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