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그녀는 4번째이자 막내를 헝가리에서 낳았는데 이름은 마리 발레리였다. 다행히 이번 아기는 시모에게 넘기지 않고 그녀가 키웠다. 아들을 잃은 것이 시모의 잘못된 군대식 교육방법도 한 몫 했다는 생각을 지녔던 그녀는, 시모와는 아주 다르게 틀에 박힌 가정교육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딸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에 이 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쩜 프란츠 요셉이 아니고 헝가리의 한 공작일지 모른다고! 다행히도 이 소문은 곧 잠잠하게 잠을 재울 수 있었는데, 딸의 외모와 성격이 황제 프란츠 요셉과 너무나 닮았다 보니 영락없이 아버지를 증명하는 지름길이 되었던 거다.

1860년 심한 기침에 시달렸던 그녀는 폐병일지도 모른다는 구실로 요양을 갔지만, 진짜 이유는 궁중생활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던 의도가 더 컸다. 그 이후 그녀는 틈만 나면 여행을 떠났다. 그녀는 유럽은 물론이요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터키, 영국 등등 많은 여행을 다녔다. 당시에는 이런 여행이 드물었던 시기였다. 얼마나 많은 수행원들이 그녀를 따랐겠는가?

이런 긴 여행 끝에 시시는 빈의 궁중에 다시 돌아오곤 했다. 이런 여행을 통해서 많이 성숙해졌던 시시는 더불어 자신감 넘치는 성격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짐작건대 시시는 시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주눅이 많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이미 역마살이 붙어버린 그녀는 빈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를 못했다.
빈에서의 생활이 좀 답답하다거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시간이 되면 그녀는 줄곧 여행을 떠났다. 이럴 즈음 시시는 그녀의 부재 시 느낄 남편의 고독감을 알아채고서는 남편의 고독을 덜어 줄 방편까지도 찾았는데 1885년 연예인 카타리나를 남편에게 소개 시켜주었던 일이다.

카타리나는 즉시 왕과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잘 지냈다. 다행하게도 왕실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이런 저런 불미스러운 소문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한다. 황제비 시시가 직접 두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아준 경우여서 그랬던지, 이 둘은 친구 관계 이상으로는 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시가 죽고 난 후에도 황제와 카타리아의 친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고! 하지만 엘리자벳이 살아 있었을 때보다 그 친분이 오히려 시들해 졌다고 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황제가 시시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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