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묺허지다

강형철

태풍 볼라벤에 이어 덴빈이 지나갔다
그냥 가기 섭섭했는지 브록크 담을 허물었다

먼 여름이었다
담쟁이덩굴로도 지탱하지 못한 구석탱이
아버지는 밀짚모자 쓰고 때웠다
시멘트 조금하고 모래를 비벼 쌓았던가

아버지는 돌아가신 뒤 그래도 의젓하게 집을 지킨 담이었는데
세상의 유일한 재산을 지킨 담이었는데

태풍이 불고 집에 물이 든 후
흙탕물에 젖은 이것저것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다음 날

담장은 허물어졌다

낡은 땀이 밴 와이셔츠 깃의 누리끼리한 때가
가끔씩 부끄러워도 차마 못 버리고 걸어두었는데
흙탕물 범벅인 옷들 내놓으며
이때다 싶어 한꺼번에 버렸는데

이제 지킬 것이 없으니
조용히 사라지겠다는 담장의 뜻을
태풍이 기어이 알고 무너뜨렸다

평생 몸의 근육만으로 세상을 지탱하던 아버지
모래를 껴안던 시멘트도 마침내 힘이 빠진 날

결국 묺허져 내렸다

▣ 태풍에 폭우가 쏟아져 집이 물에 잠겼습니다. 세상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인데 말입니다. 집이 물에 잠기자 그동안 버리지 않고 두었던 이것저것들을 이때다 하고 버립니다. 흙탕물에 젖은 허접한 것들을 버리고 나니, 이제 집이 바람이나 드나드는 통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정황을 담벼락은 알아차렸을까?

아무 것도 지킬 게 없는 집의 담벼락이 무너졌습니다. 아마 그동안 근근이 제 몸을 지탱해 온 담벼락도 ‘이때다’ 싶어 무너졌을 겁니다. 어머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훨씬 전에 돌아가셨나 봅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모래에 시멘트 조금 비벼 때운 그 담인데 말입니다.

담이 무너진 일과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이 한 가지 일로 다가옵니다. 보잘 것 없는 시골집이지만 “그래도 의젓하게 지킨” 담은, “평생 몸의 근육만으로 세상을 지탱하던” 아버지와 같습니다. 담이 집을 지켰듯 아버지는 식구를 지켰습니다. 그런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이 시에서 ‘묺허지다’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묺허지다’는 말 속엔 단순히 무너지는 것만이 아닌 ‘허물어지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세월과 가난과 늘그막 병마에 대책 없이 허물어진 아버지. 그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곧이어 담까지 무너져 버렸으니 시인의 마음은 더 참담합니다.

<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