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숙 대전공고 교사

“얘들아, 선생님이 읽는 재미라도 있게 써 주면 안되겠니?”

아이들은 정량평가 기준에 맞게 20줄 이상 써야 한다고 하면 18줄 줄거리에 판에 박힌 감상 2줄 합쳐 20줄 딱 맞춘다. 몇 편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길이 글의 아래쪽으로만 향한다.

교과서에 고전소설 ‘춘향전’의 절정과 결말 부분이 실려 있다. 변 사또의 생일잔치 날, 옥에 갇혀 있는 춘향이를 거지꼴로 찾아갔던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돼 처형 직전의 춘향이를 극적으로 구하고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춘향전’을 처음 접한다는 아이도 있어 2시간에 걸쳐 영화도 봤다. 교과서 본문 수업을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정리도 했다.

“선생님, 정말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벽이다, 이건 어떻게 할 수 없는 벽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수직으로 서서 자신에게 덮칠 듯 놓여있는 벽을 마주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아이들이 또한 벽이다.

‘춘향전’ 독서감상문을 쓰는 시간, 아이들에게 빈 양식과 함께 ‘춘향전 독서감상문 작성 길잡이’도 함께 주었다. ‘<춘향전>은 ~ 내용의 고전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다. 특히, 이 장면에서 OO이(가) ~ 라고 말한(또는 행동한) 것은 ~ 점에서 ~ 했다. 왜냐하면 ~ 이기 때문이다. 당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을 생각하며 ~을 느꼈을 것이다. 만약에 나라면 ~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면서 ~ 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사람들이 읽으면서 ~을 깨닫고 ~을 교훈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다음에는 ~ 내용의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춘향전’의 감동을 살리고 싶다.’

시작이 한결 빨라졌다. 줄거리 위주의 글에서 벗어났고 감상의 초점이 있는 글이 많았다. 참 신기했다. 틀이 정해져 있어서 비슷한 글이 나올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다양했다. 물론 이 틀을 거부한 아이도 있었다. 하던 대로 하는 게 편하다는 이유다. 20줄을 다 채우자 길잡이 내용의 뒤 세 문장은 아예 쓰지도 않았다. 괜찮다, 다 괜찮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독서감상문을 쓰지 않았는가.

특성화고 근무 3년차다. 수업 중 제일 많이 한 말, “경험이다, 수업도 경험이다, 수업 시간에는 나쁜 건 안 한다, 끝까지 완성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 해 보자, 너희 졸업하면 책 읽고 글 쓰는 일은 안녕이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소중하게 생각하자.”

아이들한테서 글 받는 일은 구애 수준이다. 그래도 '춘향전' 감상문은 다른 감상문에 비해 정말 많이 썼다. 시 ‘담쟁이’가 떠오른다.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꼈지만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이번 학기 구애는 3전 1승 2패다.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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