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작가, 한국문인협회 이사)

“대전은 문화의 뿌리가 깊지 않은 곳”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대전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도시이고,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지면서 마침내 크게 도약을 시작한 근대도시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가까운 이웃인 청주나 전주와 비교해도 도시 형성이 많이 늦은 게 사실이다.

행정구역상으로 ‘한밭’이란 지명이 ‘대전’으로 개칭된 것은 갑오개혁 무렵인 1886년이다. ‘회덕군 대전리’로 처음 대전이란 이름을 얻게 됐고, 1910년 경부선이 확실하게 지나가는 대전 쪽으로 회덕군청이 이전했다. 1914년 진잠군과 회덕군을 합쳐졌고, 공주군 일부를 편입해 대전군이 됐다. 그러다 1932년 도청이 이전됐고, 1935년 대전부(府)로 승격됐다.

대전은 일천한 역사를 가진 신생 도시라 할 수 있고, 문화의 뿌리도 짧다고 할 수 있다.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 지역으로 변방이었다. 서로 뺏고 빼앗기는 역사를 되풀이 했던 곳으로 추정되니, 정치의 중심이나 문화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전은 문화의 뿌리가 아주 깊은 동네다. 그 중에서도 우선 조선 유학의 맥을 이어가는 기호학파의 큰 인물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을 배출한 도시이니 대전이 문화의 중심, 정치의 중심, 유학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그들 두 분은 1606년과 1607년 연이어 태어난 친척이다. 율곡 이이에서 사계 김장생으로 이어져 온 유학의 기호학파는 송시열에 와서야 완성된다고 할 만큼 송시열은 송준길과 더불어 대전이 낳은 큰 인물이다. 조선시대 문신이요, 성리학자이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송시열의 제자들이 큰 무리를 이뤘고, 그의 문장 또한 압권이다. 그만하면 대전을 뿌리 깊은 동네로 칭찬할만하지 않은가!

이들 말고도 또 한 분이 대전 문화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바로 1637년 태어난 김만중이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효자 김만중은 대전의 자랑이다. 유성구 전민동 광산 김씨 문중 종산에는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의 묘가 있는데, 김만중의 무덤이 대전에 없고, 그의 문학도 유배지였던 남해문학관에 빼앗긴 것이 애석할 뿐이다.

이 세 분 말고 대전 문화의 뿌리가 깊다는 또 하나의 증좌는 바로 규방문학의 효시를 이룬 김호연재 문학의 산실이 대전이란 점이다. 홍성 김씨가에서 당시 회덕현의 은진 송씨가에 시집을 와 자리를 잡은 김호연재는 1700년대 초 대전에서 규방문학을 활짝 연 여류 시인이다. 황진이의 기방문학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에 비해 양반문학으로서의 여성문학의 장을 일궈낸 이가 바로 김호연재다. 그녀가 있었기에 우리 대전의 인문학의 뿌리는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도 후세에 이르러 또 한 분, 우리 대전의 문화를 업그레이드 시킨 분이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그는 앞에 분들과 함께 대전의 자존심이고, 자랑이다. 신채호는 대전을 한국 근대문화의 중심에 서게 한 분이 아닌가 한다.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이며, 사상가·사학자·소설가인 신채호 선생이야말로 우리 대전의 기상을 드높인 분이다. 지금도 중구 어남동에 자리한 생가에 찾아가 그분의 동상 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대전이 도시 생성의 역사가 짧고 더구나 근대화 과정에서 이민족에 의해 발전이 됐으며, 한국전쟁 당시 잿더미가 됐다가 복원되는 바람에 그저 신생 도시로서 문화의 뿌리가 깊지 않다는 오해를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대전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조상들은 최고의 지식인이었고, 당대를 주름잡았던 학자요, 문장가요, 정치인으로서 우리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분들이었다. 우리는 대전 문화의 뿌리가 깊지 못하다고 하는 열등감에서 벗어나 대전을 바로 알고 우리 대전을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할 마음의 자세를 단단히 해야 한다. 더구나 요즘 들어서는 우주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첨단과학 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 도시가 대전이다. 대전은 결코 문화의 뿌리가 깊지 않은 동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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