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남편은 제 선생님이었습니다. 하필 남편은 신안소학교 선생으로 와서는 우리집에 하숙했더랬습니다. 어느날 유학을 간다고 일본으로 떠나더니 편지가 왔습니다. 부모님은 눈이 어둡다면서 나에게 답편을 보내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서신이 이어지다가 저는 그 남자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하고 이주가 채 안돼 남편은 군대에 갔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2년이 못 돼 해방을 맞이하고 소식도 없던 남편이 서울로 오라고 기별을 합니다. 잘 지은 건물에 들어서니 태산같은 어르신이 금반지를 본인 손가락에서 빼내 저에게 끼워주셨습니다. 별로 넉넉해 보이지도 않는 분이셨는데 말이죠. 잘난 남편 두었다고 칭찬해주셔서 그런가보다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재미나게 살려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부산으로 피난가서 남편은 그 난리통에 잡지를 만들더군요. 나는 원고를 교정하고 등사기를 돌리고 수레에 책을 싣고 서점에 배달했습니다. 그 얇은 책은 찾는 이가 많았습니다. 돕겠다는 사람도 늘어 이제 좀 사는가보다 했더니 남편이 구속됐습니다. 그 책이 나쁜 생각을 전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밥먹듯 교도소를 드나들었습니다.

그 사이 태어난 다섯 아이들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칭찬을 많이 들어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남편이 막사이사이상이라는 큰 상을 받게 됐습니다. 아주 대단한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덕에 처음 내 집에서 살아봤습니다. 얼마나 등이 따시고 배가 부르던지, 다시 생각해도 행복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석 달의 호사였지요. 얼마 가지 못해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살아는지겠지요.

건강이 악화될 대로 악화된 남편이 가석방 됐습니다. 이 참에 푹 쉬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남편은 친구를 만난다며 나섰습니다. 그 날만큼은 남편이 좀 미웠습니다. 그렇게 나갔으면 일찍이나 들어올 것이지 지금까지도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남편은 죽었습니다. 등산하다가 떨어져 죽었답니다. 억소리도 못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죽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가난은 익숙해서 상관없는데 다섯 자식이 먹지도, 배우지도 못했고 직업 갖기도 어려웠습니다. 맞아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큰 아들은 망명해서 24년을 타지에서 떠돌아야 했습니다. 집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형사가 진을 치고 쏘아보는 데다 월세도 제때 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았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느 날 문을 나서면 쌀이 있고, 고기 한 덩이가 있고 채소가 있었습니다. 우릴 도왔다고 조사를 받은 사람도 있다고 들어 울며 기도해드렸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번듯한 직업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은 집요한 세무조사를 받아야 했고 버티면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폐가에 살며 어떻게 2018년이 됐군요. 근데 제가 많이 아파 더는 못 살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지난 7월 2일에 죽었습니다.

저는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입니다. 나에게 금반지를 끼워주신 어른은 백범 김구 선생님이셨습니다. 잘 살다 갑니다. 여러분도 미안해 말고 무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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