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규민(세종양지중 1학년)

글쎄요. 사회통념을 바꾸는 게 그리 쉬운 일일까요. 여성에겐 사회진출 기회가 없었던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우리나라 1호 신여성, ‘나혜석을 소개해 보려 합니다. 그녀는 기회의 평등, 패미니즘, 남녀평등, 자유연애 등을 외쳤습니다. 너무 강하고 파격적인 주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다 주변의 미움을 샀고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곤 얻은 것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나혜석은 1896년 현재의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호조참판 등 관직을 지내면서 꽤 부유한 가정이었습니다. 아버지 나기정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딸에게도 선진적인 교육을 시켰기에 그녀는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도 우수해 장학생으로 뽑혔을 정도라고 합니다. 졸업 후 둘째 오빠의 조언으로 일본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선 몇 없는 여자 유학생이었죠. 그녀는 유학을 가서도 여러 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잡지 학지광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합니다. 1914년엔 현모양처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사회적으로 파문이 일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상적 부인 등을 통해 여성도 자신이 인간임을 알아야 하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또 일본의 페미니스트 잡지 세이토를 통해 남녀 평등론, 여성 해방론을 접하게 됩니다. ‘인형의 집이라는 문학작품은 나혜석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데요. 주인공이 자신의 자유를 찾아 남편과 자식을 남겨놓고 가는 모습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31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독립에 대한 의지도 남달랐습니다. 이후 자신의 작품들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자 필명을 사용하면서도 글 기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시나 소설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친구들과 잡지를 창간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소설 경희를 발표, 계속해서 여성 인권향상에 힘쓰죠. 이때쯤 첫 번째 남자친구였던 최승구가 병으로 죽은 아픔을 잊고 김우영과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의 첫 신혼여행지가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아마 놀랄 겁니다. 바로 나혜석의 첫번 째 남자친구 최승구의 묘지였습니다. 그녀가 김우영과 결혼할 때 자신을 방해하지 않는 등 여러 조건을 내걸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최린과 연애를 하는 게 원인이 돼 결혼 10년 만인 1930년 이혼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녀는 이혼 고백서를 통해 남녀관계의 불평등을 매우 강하게 비판했지만 나혜석의 생각과는 다르게 엄청난 비난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이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며 시대의 통념을 맹렬히 비판했습니다. 계속해서 여러 운동에 참여하던 그녀는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됐고 광복 후 얼마 있지 않아 한 병원에서 소지품 하나 발견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노숙자 신세였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관보에 주소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한 여자가 죽었다고만 발표됐습니다. 그녀는 행방불명으로 알려졌고 모두 실종됐거나 죽었다 생각했을 뿐 찾는 이조차 없었답니다.

오직 자신의 신념을, 여성의 인권을, 남녀평등을 위해 정말 모든 걸 쏟아붇고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돌아가신 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끊임없이 사회와 투쟁하던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는 바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거센 비난이 돌아왔을 때의 느낌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나라의 신여성,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그녀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겨우 7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적극적인 여성 인권운동이 시작되는 중입니다. 지금도 여성들의 움직임에 적잖은 시각이 부정적입니다. 그러니 70년 전 그날은 칼처럼 그녀를 도려냈을 겁니다. 여자, 그게 뭐라고 천재를 박제로 만들었을까요.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