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재(세종양지중 1학년)

저는 벼슬이 성균관대사성까지 제수됐으니 한낱 스파이가 아니었습니다. 제 스승은 이곡 선생님이시고 그 자제분은 성리학의 허브 이색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니 제 동기들이 이색, 정몽주, 정도전입니다. 문과를 급제한 나름 천재였습니다.

저는 1360년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때는 원이 망하고 명나라가 일어나던 어수선한 시절이라 중국의 질서가 많이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목화씨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붓 뚜껑에 숨겨왔다는 이야기가 현대에 전해진답니다. 하지만 저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당하게 가져왔습니다.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만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목화씨는 주머니에 넣어 올 정도로 흔했다고 적혀있습니다. 제가 한일은 아마 목화를 한반도에 적응시킨 것이지 싶습니다.

고려에 돌아와 저는 고향땅 산청에 목화를 심었습니다. 혹시나 실패할까 두려워 장인어른(장천익)에게 절반을 드렸습니다. 목화를 재배하는 일은 그리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실패하고 도와주던 장인어른이 심은 씨앗 중 딱 한 송이가 꽃을 피웠습니다.

대박이었습니다. 그 한 송이에서 씨앗이 약 100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만 남아 이 글에서 감사함을 전하고자합니다. 저희는 그 씨앗을 심고 재배를 반복했습니다. 3년 후 목화는 끝없이 이어진 밭을 가득 채웠습니다. 재배를 반복하던 중 장인어른이 화승의 도움을 받아 목화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퍼트렸습니다. 실을 뽑는 도구를 물레라고 하는데 제 손자이름이 문래였습니다. 이름에 사심이 들어갔군요.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저는 고려 우왕 때 1735년 전의주부로 등재됐습니다. 저는 1398, 70세 나이로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비록 사망했지만 저는 후회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해줬기에 기뻤습니다. 이때부터 사람으로 태어나면 솜옷을 입게 됐습니다. 귀족만 입는 옷이었는데 이젠 얇게 뽑아 여름에 시원하게 입고 겨울에는 솜에 천을 대고 누벼서 구스다운 부럽지 않은 외투를 만들었습니다. 포근하고 따뜻해서 많은 사람들을 동장군으로부터 지켜내 사람 구하고 나라를 구했다며 남명 조식 선생님이 치켜세워 주셨더군요.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 남명 조식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이만 정리하겠습니다.

문익점 할아버지, 저는 손자 남평문씨 문현재입니다. 할아버지가 유명한 분인 줄만 알았더니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을 때마다 항상 나라를 위해 고민하셨다는 삼우당 문익점 할아버지를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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