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대 명예교수

우리 삶에서 이 문제처럼 어려운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일상생활에서 약하거나 어린 사람이 강하거나 큰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비비면서 ‘용서해주세요’라고 애원하는 장면을 본다.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끝 모르는 슬픔과 함께 인권과 인격의 몰락에 대한 좌절감을 가지게 된다.

무엇이 그렇게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자기 전존재로 비굴함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게 했을까? 과연 그는 그렇게 빌 만큼 크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내려다보며 마치 온 우주의 풍만한 기운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강대한 세력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 모습을 그려볼 때 맘은 참으로 슬프고 갈가리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다. 용서와 화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동안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이란 이름으로 진행하는 아주 좋은 평화훈련 프로그램을 다른 친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개인이 되었든 집단이나 민족이나 국가가 되었든 평화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는 겉에 드러나는 사건들이나 상황들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 무엇인가가 웅크리거나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을 찾고 느끼지 않고는 결코 밝고 맑은 삶으로 상징되는 자유로우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나는 이번에 이 훈련과정을 진행하면서 평화의 길로 가는 아주 훌륭한 것이 용서와 화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일이나 다른 나라나 지역의 일이라면 쉽게 용서와 화해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가 자신의 일이라고 할 때는 참으로 어렵다.

우리의 삶이라는 좁은 것에 국한하여 본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가만히 나 자신을 살펴보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또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어른이 된 뒤에도 굉장히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주고받은(을) 용서거리들이 얼마나 많던가? 확연히 겉으로 들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속 깊은 곳에 응어리로 남아 있던 풀리지 않는 것이 있어서 삶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던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비우고 허허롭게 살고자 하여도, 하늘을 향해 놀랍게 부끄럼 없이 살고 싶어도 웅크린 분노와 좌절과 원망들이 쌓여서 갈 길을 막던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데도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에 수도 없이 끊임없이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용서할 수 없는 일과 사람을 용서하라고 할 때 얼마나 부자유한 삶을 강요받는 것인가?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용서하라고 하는 것도 힘 드는 일이지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하지 못하여 답답한 그 맘에 또 다른 부자유함을 주는 그 요구는 정당한 것인가를 묻는 그 맘은 또 얼마나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처럼 어두운 일인가? 맘으로는 용서해야지 하면서도 실제로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또 용서할 수 없이 부끄럼으로 다가오는 때는 얼마나 많던가?

분위기가 조성이 되고 맘이 열려서 서로 깊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는 듯한 사람 속에서 분노와 좌절과 실망과 무기력감이 끝없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다. 그것 때문에 삶이 해방감을 가지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때로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때로는 아들과 딸에게, 때로는 친구들이나 선생들에게, 때로는 남편과 아내, 또는 애인들 사이에서 겪었던 것들이 삶을 이끌어 온 것들이면서 또 다른 걸림돌이었던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답답했던 일들. 그것을 확 털어내 버릴 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속 시원함을 느끼던가?

그러니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나 어떤 분위기와 집단을 찾거나 만드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이러할 때 자기를 열고 속을 다 헤쳐 본다. 맘을 열고 속을 헤쳐 본다는 것은 맑은 듯이 보이던 고인 물동이 속에 막대기 하나 넣고 휘 저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일생을 살아오면서 침전된 것들이 겉으로 솟아오른다. 그 중에서도 어떤 아주 핵심 되는 침전물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때 그것을 어찌해야 할까? 소리 높이 외쳐야 한다. 강제로 추행을 당했던 것, 누구로부터 인격의 핵심 되는 부분을 손상당했던 것, 한없이 억울했던 것들, 반대로 그러한 일들을 가했던 것들을 겉으로 솟구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은 지났고, 사람도 사건도 다 사라져버려서 더 이상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들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도 많다. 이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맑고 밝게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삶을 위하여 외쳐야 한다. 호소해야 한다.

용서하지 못할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외치고, 용서받을 일은 용서해 달라고 외치고, 용서할 일은 시간이 늦었더라도 용서한다고 공개해서 외쳐야 한다. 용서하거나 받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이며,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일이다.

내가 나를 용서하고, 내가 나와 화해할 때 자유로워지고 밝아지고 맑아진다. 그 때 용서 못할 일을 찾아서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용서하지 못하는 옹졸한 듯이 보이던 자신이 용서된다.

그 방법과 시간과 장소는 각각 다르겠지만, 개인이나 사회는 그런 용서를 받고 주는 경험들이 있을 때 해방되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자유롭고 행방된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내가 용서 못하던 것,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찾아본다. 그것이 내 삶을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로 이끄는 첫 걸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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