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힘든 일이 지나면 즐거운 일이 온다는 뜻이다. 대청호오백리길 10구간이 바로 이 말과 일맥상통한다. 10구간 내내 체력이 달리고 힘에 부치며 숨을 헐떡이지만 마지막에 대청호오백리길이 주는 선물은 이전의 고생을 모두 잊게 한다. 달디 단 열매가 주는 평온함의 중독성. 이제껏 느낀 고단함을 씻어주는 아름다움이야 말로 이곳 대청호오백리길 10구간에 모두 농축됐다.

◆ 더없이 높은 하늘, 너무나 맑은 구름
대청호오백리길 중 대전에 위치한 구간은 연속성이 이어진다. 가령 1구간의 종점이 2구간의 시작점처럼 말이다. 그러나 충북에 있는 구간은 대전처럼 연속성은 없다. 그러나 충북의 구간은 대청호의 다양한 매력을 보여준다. 대청호오백리길 10구간은 9구간의 종착지와 멀리 떨어진 장계관광지 부근에서 시작한다. 10구간의 출발지는 장계대교인데 새로운 장계대교가 생겼기 때문에 옛 장계대교를 찾아야 한다. 장계대교 옆 옛 장계대교가 있기 때문에 길을 헷갈릴 일은 거의 없다.

10구간을 출발하기에 앞서 장계대교를 바라보며 충분히 심호흡을 해보는 걸 추천한다. 산이 제법 가파르기 때문이다. 장계대교 밑에서 반짝이는 햇빛을 머금은 금강을 보며 “난 할 수 있다”라고 충분히 인식시킨다. 뇌로 가는 운동신경에 충분히 자극을 줬건만, 감각신경은 여전히 불안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구간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게 들어서다. 그렇지만 대청호오백리길 유랑단의 올 10월의 첫 탐방을 기념하듯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높고 구름은 한없이 맑다.

본보 18일자 10~11면 대청호오백리길 지면

 

장계대교를 왼쪽으로 끼고 충청권에서 분위기 좋기로 유명한 ‘뿌리 깊은 나무’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곧바로 오른쪽으로 돌면 등산로가 나온다. 대청호오백리길 10구간의 본격적인 출발지라 할 수 있다. 등산로부터 시작되는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쭉 이어진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면 가파르기는 이 정도가 될 성싶다. 계단 수도 많아 좀처럼 끝은 보이지 않는다. 숨은 금세 차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대청호를 보지 않았음에도 들숨과 날숨은 벌써 천국에 다가온 것처럼 거세진다. 힘이 부칠 때마다 잠시 고개를 돌리면 ‘내가 벌써 이렇게 높이 올라왔나?’ 싶을 정도로 경치가 제법 좋다.

절경이라 하긴 어렵지만 조금이라도 하늘과 가까운 높은 고도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이내 심신은 상쾌해진다. 더없이 높은 하늘이, 너무나도 맑은 구름이 시신경이란 매개를 통해 아름다운 영상을 뇌에 전달한다. 즐거워진 뇌에 몸은 자신도 모르게 힘을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느새 계단의 끝자락에 도착한다. 참나무골산의 정상이다. 멀리서 보이는 장계대교, 그 밑을 받쳐주는 푸른 금강, 그리고 참나무골산까지 올라온 가을의 코스모스까지 시각에 행복을 전달한다.

천고(天高)는 이곳에서 그 누구보다 유랑단에 가깝다. 그리고 구름의 끝자락 중 한 오라기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다. 그리고 바람따라 구름따라 이슬봉으로 향한다. 참나무골산이 워낙 가파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봉까지의 여정은 그리 많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능선을 따라 걷는 것이기 때문에 두세 차례의 오름과 내림이 마치 인생처럼 이어져있다. 그러나 인생과 달리 오르막에선 표정이 구겨지고 내리막에선 미소가 환해진다.

어느덧 이슬봉에 도착하면 참나무골산의 정상처럼 시원한 느낌은 없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자생한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 금강으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한다. 그러나 느낄 순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곳을 찾아온 등산회의 형형색색 표식은 이곳이 얼마나 절경이었는지도. 하늘에서 분 바람도 거대한 푸름(大淸)을 타고 은은하게 향을 내며 후각을 자극한다. 눈을 살며시 감고 대청의 향으로 잠시 숨을 돌린다.

 

◆ 과정은 힘들다. 그러나 결과는 아름답다. 인생처럼…
이슬봉에서 충분히 쉰 뒤 발걸음을 옮기면 10구간에서 계속 보이는 울창한 수해(樹海)가 이어진다. 10구간 초반인 참나무골산에서 보였던 코스모스와 풀벌레 소리는 수해에서 모습을 감추고 푸른 잡초와 매미 울음소리가 펼쳐진다. 제법 내린 기온, 한없이 높은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불협화음의 모습이 또 대청호오백리길의 매력 아니던가. 7년을 캄캄한 땅속에서 지내며 세상을 꿈꿔온 악사가 일주일의 짧은 생 동안 짝을 찾는데 그의 사랑가가 열정적이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좋아진다는 것처럼 대청호(금강)가 보이지 않으니 이처럼 그 외의 요소들이 더욱 감성적으로 느껴진다.

풀포기 하나에 앉은 메뚜기의 생을 위한 뜀박질, 그 밑에서 먹을 걸 찾아 움직이는 개미들의 움직임까지 그저 하나의 행위예술처럼 기존과는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계속된 걸음에 지쳐 바닥에라도 풀썩 누워버리며 삶을 향한 그들의 움직임은 더욱 깊게 마음을 울린다. 이슬봉을 한참이나 지나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한 포인트에 도착한다.

이제까지의 10구간은 수해로 인해 금강으로 가는 시선을 차단했지만 유독 이곳만큼은 매력적인 그녀석의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진을 찍을 정도의 공간만을 남겼다.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곧바로 400m 밑으로 떨어지겠지만 장미는 가시가 있어야 끌리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싶은 절경에 무서움에도 한 발짝, 그리고 경외심에 한 발짝 더 내민다.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까지 절벽에 가까이서 한눈에 보이는 금강의 굽이친 모습을 1000만 화소도 되지 않는 인간들이 만든 조촐한 광학기기에 담아본다.

금강의 매력은 1억, 아니 1조 화소의 기기에도 담기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조졸한 영상기기에 담긴 그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다. 일체화된 높은 하늘, 깊은 금강의 색은 산봉우리란 경계선을 통해서만 이원화 된다. 고진감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은 언제나 뻔하다. 그러나 금강은 쓰디쓴 과정을 거친 자에게만 공개한다. 그리고 절경은 너무나 황홀하다. 그래서 또 한 번의 휴식을 절경 앞에서 강제적으로 갖게 된다.

이제 9구간의 며느리재와는 멀지 않다. 며느리재까지 도착하면 10구간의 80% 이상은 왔다는 뜻이다. 9구간과 10구간이 만나는 구간은 불과 200여m밖에 안 된다. 그리고 10구간의 마지막인 안터마을까지 5㎞가 남았다는 안내판을 만나면 이제 오르내림은 딱 세 번이 남았다. 그러나 오름은 계속해서 완만해지고 내림은 오히려 더욱 가팔라진다. 이제 마지막이 남지 않았다는 걸 알린다. 그리고 안터마을의 초입인 안터교가 조금씩 거대해진다. 내림이 완전히 끝나면 안터교까지 불과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안터교에서 조금 더 안터마을로 들어서면 대청호오백리길 10구간의 마침표를 찍는다. 몸은 힘들지만 그렇다고 바로 여행을 마무리 짓지 말자.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져간다. 그리고 높았던 하늘은 이제 별이란 화장을 할 준비를 마친다. 잠깐이지만 해가 져가는 모습에 폭발할 감정을 추스르고 힘들었지만, 결국 다가올 아름다웠던 모습을 바라봤을 때의 희열감을 상기해보자. 딱 우리네 인생이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사진=노승환 기자
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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