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몇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형태의 강의를 진행한 일이 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30~40년 전과 비교하면 교실에서는 상전벽해의 변화가 일어났다. 시설 면에서 선진화 된 것이 우선 눈에 띈다. 다음은 학급당 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는 점이다. 시골학교의 경우, 한 반의 인원이 불과 수 명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직접 수업을 진행해 보면 왜 학급당 인원을 줄여야 하는지 몸으로 느낀다. 학교로 수업을 다녀보기 전에는 학급당 인원을 줄인다는 뉴스를 들으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 세대는 한 반에 65명 전후의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지만 무리 없이 잘 자랐다는 논리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수업을 해보면 학급당 적정 인원은 20명 이내라는 사실을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 학생과 교사가 교감하면서 수업을 하려면 20명 이하의 학생이라야 한다, 그 인원을 초과하면 집중력 있게 수업을 진행하기 어렵다. 수업을 해보면 과거 65명이 한 학급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대학의 교양과목 수업도 수강생이 40명을 넘어서면 원활한 진행이 어려운데 초중고생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과거의 학교에는 폭력이 난무했다. 한 사람의 교사가 65명 전후의 학생을 일시에 통제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폭력의 허용이다. 당시에는 일제의 군국주의, 전체주의 문화가 남아있는 데다 군부의 군사문화가 학교에 고스란히 적용되던 시기여서 교사들에 의한 학교폭력이 훈육이라는 명분으로 합법화 되었다. 교사들은 통제의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했다. 한 명의 학생을 희생양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면 다른 학생들은 겁에 질려 통제에 순응했다. 교사들은 물론 학부모들까지도 그것이 대단히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학교 내에서 폭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은 인간사에서 폭력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학교는 물론 세상 어느 곳에서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극소수지만 일부 교사들은 통제와 훈육, 폭력 등 과거의 시스템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폭력이 사라진 이후 학교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점을 폭력이 없어진 탓, 맞지 않고 자란 아이들 탓으로만 돌리려는 교사들도 있다. 폭력 없는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이 교사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수업시간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러나 통제를 이유로 폭력이 난무하던 과거의 교실로 회귀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직 완전히 이성적이지 못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폭력 없이 대화만을 이용해 수업을 잘 진행하고 생활지도를 잘 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래서 교사들의 피로도가 높다는 사실도 충분히 이해한다. 어려운 임용의 과정을 거쳐 교사가 됐지만 도무지 통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얼마나 지치고 힘들지 상상이 된다. 교단을 떠나는 교사들의 심정도 헤아릴 수 있다.

폭력을 학교에서 몰아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폭력이 동원되면 너무 쉽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고, 선의의 피해자 발생도 막을 수 있는데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니 교사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교에서 폭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20여 년 전부터 비폭력 교육이 정착되고 있다. 물론 교사들은 많이 힘들어졌다. 폭력이라는 간단한 방법을 두고 먼 길을 돌아서 가자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것 같다.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유혹도 많았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때리는 일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학교 외에 군대나 교도소 같이 다수의 인원을 일정한 공간에 수용하고 있는 시설의 경우, 폭력의 발생 가능성은 크다. 관리하고 통제하는 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사용하면 다수의 인원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폭력은 이미 과거의 용어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발붙일 수 없는 용어이다. 폭력이 사라질 때 비로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이 완성된다는 사실에 공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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