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무관심이 빚은 슬픈 형상 따뜻함과 냉정함 조화 이뤄

계단참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저 사내
햇살 따가운 한낮 겹겹 옷을 껴입고 왜 맨발일까
커다랗고 거칠고 퉁퉁 부어오른 코끼리 발등
시끄러운 소음과 매연 그리고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사내
빵집 앞에서 주유소 앞에서 늘
어느 모퉁이 길바닥에서
거구를 이끌고 느릿느릿
걸어가거나 우멍하게 앉아 있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나는 코끼리 한 마리가 도심에 출몰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원시림을 떠났거나 동물원 울타리 부수고 탈출했거나
슬며시 이 도시에 나타난
그가 뭘 먹는 걸 보지 못했다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
눕거나 조는 것도
보지 못했다

도시는 그의 몸집보다 거대했고
그는 이 도시의 완벽한 그림자였다
누구에게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포획하러 오지 않았다
점점 불어나는 그의 몸이 언젠가는
이 도시를 꽉 채우는 집이 될 것이다
걸인의 식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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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례 시인

시집의 제목 속 ‘당신’이라는 담백한 한 마디에는 삶의 궤적이 담겨있다. 커다란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아웅다웅 살아가는 소시민의 애환과 사랑이 함순례 시인의 진지하고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다시금 구현됐기 때문이다.

무관심이 빚어낸 찰나의 순간과 눈길이 가지 않는 무덤덤한 일상들도 함 시인은 허투루 스쳐 보내지 않고 시로 빚어냈다. ‘걸인의 식사’, ‘점원, 우아하게’, ‘블랙홀’ 등에선 우리가 외면하는 그러나 다시금 바라봐야 할 익숙한 풍경들이 그려져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의 모습은 반복되는 삶 속에서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사람들과 어울리며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때로는 혼자 그저 그런 모습으로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함 시인이 세 번째 시집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도서출판 애지)를 펴냈다. 시집은 아픔의 시간을 보듬었던 기존의 시들과 달리 도심 속 소시민의 뜨거운 발자취를 쫓아 냉정하면서도 절제된 시각으로 형상화했다. 근대 산업사회의 그늘에서 거듭된 노동, 허기, 사랑을 따라 슬픔과 아픔에 치열하게 맞서는 모습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무관심에서 점점 몸집이 커지는 맨발의 걸인, 알바를 벗어나고자 점원이 된 청춘 등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에서 따뜻하고 차분한 시각이 엿보이는 게 그렇다. 이는 함 시인이 걸인의 남루한 행색, 알바에 주눅든 젊은이를 보고 슬픔과 아픔을 발견했기에 가능했다.

그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작고 연약해 보호받지 못하는 것들을 불특정 다수로 포용, 절묘한 미감으로 그렸다. 특히 함 시인은 시를 이끌어 가면서 ‘길’이라는 소재를 자주 등장시킨다. 길은 ‘당신’에게 향하는 것으로 무수히 많은 소시민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다. 가장 낮고 익숙한 곳에서 시작되는 그의 시는 진정 어린 시선으로 다가온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시집은 52편의 시를 담고 있다.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함 시인은 지난 1993년 ‘시와 사회’로 등단해 시집 ‘뜨거운 발’, ‘혹시나’를 펴냈으며 활발한 문단 활동을 인정받아 제9회 한남문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그는 한국작가회의 회원, 작은 시(詩)앗 채송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함 시인은 “거대 도시 속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품고 그려내고 싶었다”며 “시집에서 가리키는 당신은 세계와 함께 혼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당신을 호명한다”고 말했다.

 

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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