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12구간. 이곳은 이제야 가을의 손길이 막 닿았다. 단풍과 은행은 지나간 시간을 뒤로한 채 바닥에 앉아 새로운 생명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 그러나 대청호오백리길 12구간에선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매력이 이제 막 꽃을 피웠을 뿐이다. 대청호오백리길 12구간 이후부턴 이제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 올해 대청호오백리길의 마지막 단풍과 은행은 아침이 오기 전 가장 어두운 것처럼, 불길이 꺼지기 직전 가장 빨간 잉걸불처럼 무척이나 찬란했다.

◆ 모과와 감이 향기로운 말티고개
대청호오백리길 11구간의 청마학교에서 끊겼던 발걸음이 말티고개로 이어진다. 청마학교의 중심인 거대한 느티나무에서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모든 장비를 점검한다. 장비에 이상이 없음을 모두 확인한 뒤 곧바로 교문을 나와 왼쪽으로 향한다. 곧바로 오르막인 말티고개의 시작이다. 말티고개는 해발 400m를 넘지만 아무도 산이라 하지 않는다. 말티고개의 유래는 고려 태조 왕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왕건이 충북의 속리산을 구경하기 위해 이곳을 넘어야 했는데 왕이 감히 지나가는데 길이 정비가 돼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하들은 선발대를 꾸려 이곳을 넘기 위해 엷은 돌을 깐 것이 시초가 돼 지금의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설은 말티고개의 말은 마루란 뜻으로 즉, 말티고개는 높은 고개란 뜻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오르막은 비교적 가파르지만 생각보단 힘들진 않다. 왕건을 위한 돌들이 지천에 깔려 아스팔트를 걷는 것보단 낫다. 가을하늘이 그렇게 높다지만 말티고개는 초반부터 가파르기 때문에 30분 정도만 걸어도 마루에 금방 머리가 닿는다. 높아진 고도로 시야도 확 트인다. 아침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 속리산의 언덕배기도 시간이 흐르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반면 금강과 청마학교를 잇는 청마교(청마1길)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져간다. 그만큼 높이 올랐다는 것이다. 곳곳에 과실을 피우기 시작한 감나무도 한껏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금강을 뒤로하고 계속 말티고개 정상을 향한다. 쭉 이어지는 구부러진 길은 계속해서 모습을 바꾼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거대한 나무의 하늘을 만드는가 하면 대나무를 곧게 세워 동쪽에서 핀 태양을 가려준다. 모과나무와 감나무도 등장시키며 걷는 길이 심심하지 않게 한다. 청마학교에서 나선 지 두 시간이 조금 안됐을까. 말티고개의 끝이 나온다. 대청호오백리길 시즌1과 시즌2에서 만났던 농부 소설가 김봉난 할머니의 집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곳곳에 사람이 산 흔적이 있지만 오래되지 않은 걸 보니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보다. 계속 아쉬운 마음에 김 할머니의 댁을 서성인다. 흡사 멀리서 보면 도둑놈이 뭘 훔치러 왔겠나 싶지만 그저 순수한 마음에 그곳을 서성일 뿐이다.

김 할머니의 댁까지 왔다면 말티고개는 절반 이상을 지났다고 볼 수 있다. 위청마을로 향하는 하나의 오르막만 주파한다면 사실상 내리막의 연속이다. 위청마을을 향해 15분 정도 걸으면 드디어 내리막을 만날 수 있다. 내리막이 시작됐다고 마냥 좋아하면 안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작은 시련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서다. 내리막을 향해 ‘같이 가요. 대청호오백리길’ 팀 중 한 명이 막 뛰어 내려가다 갑자기 큰 소리로 멈춰 선다. “앗 따가워!” 그러면서 무언갈 막 털어내지만 초록의 동그란 물체는 껌딱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적 슬기로운생활이란 교과서에서 봤던 도깨비풀이다. 하나의 장애물을 지날 때마다 도깨비풀은 도깨비처럼 나타나 엉겨 붙는다. 붙은 채로 다니자니 움직일 때마다 따끔거리고, 떼고 가자니 금세 다시 붙는다. 연인을 두고 떠난 선비처럼 자꾸 발걸음을 멈춰 선다. 그리고 작업(?)이 계속된다. 그렇게 말티고개를 지나 아래청마을로 들어선다.

◆ 가을의 마지막, 감나무의 감이 피었습니다
아래청마을에 들어서고 제대로 길을 들어선 게 맞는지 휴대전화의 지도를 켜본다. 잠깐 길을 헤매긴 했지만 어찌됐든 잘 들어선 것 같다. 그런데 지도상엔 아래청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혼자 예상으론 청마리의 북쪽, 고도가 높은 쪽이 위청마을이고 아래쪽, 남쪽은 아래청마을인가보다. 아래청마을에서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이름을 알 수 없는 강아지떼다. 오랜만에 사람이라도 봤는지 서너 마리의 강아지들이 작은 귀를 펄럭이며 짧은 다리로 힘껏 달려온다. 그런데 용케도 넘어지는 녀석은 없다. 이 녀석들의 크기를 보아하니 모두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 같지만 색깔은 모두 제각각이다. 변 묻은 개인가보다. 한창을 달려오다 주인에게라도 한 소리 들었는지 갑자기 멈춰서고 왔던 방향으로 돌아간다.

돌아간 곳이 어딘가 살펴보니 그들네가 돌아간 집엔 거대한 감나무가 자리했다. '감이 피었다'는 말이 들 정도로 주황의 달콤함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누군가 없었다면 몰래 들어가 맨발로 올라가 따보고 싶을 정도. 가덕교까지 이어지는 길섶엔 계속 감나무가 위치했다. 감나무에서 나는 향이 너무 달달해 금강이 보여도 전혀 모를 정도. 집밖을 넘어온 감나무 가지가 없는지 잘 살피지만 불현듯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감 향기에 잊혔던 이성이 돌아오는 순간이다. 가덕교를 지나 왼쪽 지수리로 향하면 대청호오백리길 시즌3에서 소개했던 자전거길이 나온다. 향수길이다. 12구간에서 가장 가까이 금강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천천히 걸으니 그때완 다른 감정을 느낀다. 가을감성이다. 작은 바람에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을 듯 마지막 잎새처럼 남은 은행과 단풍이 겨울을 준비한다.

지난해 막 봄을 향해 달려가는 벚꽃의 시기완 다르다. 어느덧 해도 동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간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옴을 알린다. 노을을 흠뻑 머금은 금강은 어느 때보다 금빛을 반짝인다. 12구간 내내 계속된 풀벌레소리도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작은 마을이 등장한다. 충북유형문화재 제192호인 경율당이 위치한 종미리마을이다. 경율당은 1735년 영조 때의 학자인 경율의 전후회(全後會)가 마을입구에 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서당은 종미리마을 규모를 고려하면 생각보단 크다. 지금이야 모두가 도시로 나갔겠지만 과거엔 얼마나 많은 양반들이 이곳을 들렀는지 알게 한다.

드디어 해는 질 준비를, 달은 나올 준비를 마쳤다. 이 무렵 또 다른 한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미로처럼 들어선 마을길이지만 마을버스라도 다니는지 버스정류장 푯말이 곳곳에 보인다. 이를 이정표 삼아 12구간 도착지인 안남면사무소로 향한다. 계속된 발걸음에 지쳤지만 시야가 탁 트여 5분 안에 도착할 것 같다. 오아시스란 신기루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시야가 너무 좋으니 먼 거리도 가까워 보인다. 5분만, 5분만 하다 어느새 20분이나 걸려 안남면사무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렇게 우렁차던 풀벌레는 종적을 감췄다. 12구간 초입에서 그렇게 화려했던 단풍과 은행은 목적지에서 많이 떨어졌다. 짧은 사이에 가을은 그렇게 간 것이다.

글・사진=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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