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우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뜻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물질적인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신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배부른 돼지’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또한 아직은 부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아마 그 동안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근래에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된 적 있었다. ‘배부른 돼지’가 있다면 ‘배고픈 돼지’도 있을 것이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배부른 소크라테스’도 있을 것이다. 배가 고픈 소크라테스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좋고 당연히 문제가 될 것도 없다. 배만 부르면 되는 돼지에게 ‘배부른 돼지’는 바라던 것인 만큼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배고픈 돼지’의 경우이다. 배가 부르게 사는 것만을 염원하는 돼지에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처럼 견디기 어려운 일은 아마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밀(John Stuart Mill)의 이 명언은 사실은 밀이 말한 그대로는 아니다. 원래 밀은 “만족한(satisfied) 돼지보다 불만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좋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말하기 좋게 줄여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고 하기 시작했는데, 문장이 간명하게 바뀌었지만 본래의 뜻을 해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명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흔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알려진 벤담(Jeremy Bentham)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쾌락은 선이고 고통은 악이다. 인간은 자신의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행동이 개인과 사회에 최대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다. 결국 자신은 물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동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옳지 못한 행동이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가능한 한 행복을 촉진하고 불행을 억제해야 한다는 벤담 공리주의의 주장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쾌락을 주는가 여부만을 잣대로 하여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했기 때문에 ‘돼지의 철학’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편 밀은 물질적인 욕망이나 지배욕 같은 동물적인 쾌락은 쫓으면 쫓을수록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 따라서 질적으로 차원이 높은 정신적이고 인간적인 쾌락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좋다'고 한 밀의 명언은 바로 쾌락의 양(量)만 따지고 질(質)에는 무관심했던 벤담 공리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질적 공리주의의 선언이었던 셈이다.

인간은 개인적인 존재로 살 수 없으며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벤담이 착안했던 것처럼 인간을 쾌락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대화하려는 존재로만 파악한다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배고픈 소크라테스나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기 위해 학문과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성리학에서 도심이 인심의 주인이 되는 수양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이 정신적 각성을 이루지 못하고 물질적 욕망에만 기울게 된다면 끝도 없는 탐진치(貪瞋癡)에 오염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갈애(渴愛)의 바다에 빠지게 되면 고통의 나락이 된다. 물질적 욕망을 쫓는 ‘배고픈 돼지’에게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문제는 ‘배고픈 돼지’는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같이 다른 무엇에 비해 더 낫거나 못하다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이 한 개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더 무서운 것이다. 마침 내년이 기해년이다. 모쪼록 더 이상 ‘배고픈 돼지’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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