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마지막까지 눈이 앉은 대청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나름의 운치를 끝까지 기대했지만 날씨는 기대를 실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청호는 존재만으로 무게감은 남다르다. 눈이 오는 운치 있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지만 본연의 모습으로 겨울을 보내고 있다. 올해의 마지막까지 대청호는 거대한 푸름 그 자체였다.

◆ 구름이 오가는 길
대청호오백리길 15구간은 구름이 아주 유명하다. 구름과 만날 수 있는 고도가 계속되기 때문에 구름고갯길이라고도 불린다. 15구간의 처음은 이름만큼 높은 고도에 위치하지 않았다. 지난 구간의 종점인 충북 옥천 답양리에서 가파르지 않은 오름이 천천히 이어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초반은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벼운 마음에, 산책에 나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떼면 된다.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볍지만 대청호를 때리고 오는 차가운 호숫바람만이 이번 구간의 난적이다.

여기에 점차 고도까지 높아지며 발바닥이 아파오고 귓불을 때리는 바람 역시 점점 칼날 같아진다. 운치가 좋은 구름과 함께 길을 거닐기 위해선 어찌 보면 통과해야하는 의례 같은 것이다. 매서운 찬바람을 뚫고 굽이치는 굽은 길에 들어서면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고도가 높아질 때마다 시야는 점차 트이며 칼날 바람은 피부를 아프게 하지만 기분은 시원해진다. 생명이 다한 낙엽은 모두 으스러져 바람에 날아가 지금은 작은 돌들만이 구름고갯길을 안내한다.

제멋대로 생긴 돌들이 걷는데 걸림돌이 된다. 경치에만 집중한다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고도가 높아지고 고개를 쉽게 돌리면 안 되는 이유다. 그런데 이상하다. 경치는 오지 중 오지이지만 금세 잘 포장된 도로가 나온다.
“외지에서 왔지만 내가 정말 이장질 열심히 하려고 해놓은 게 있어… 편하게들 갔다들 와.”
출발 전 답양리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장께서 그렇게 자랑하던 포장도로인가보다. 포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도로는 흔한 생채기 하나 없어 보인다. 포장도로 끝자락에 설치된 보호난간 역시 구름과 같은 아주 깨끗한 은은한 회색을 띤다. 그리고 이곳에서 드디어 구름이 오가는 길을 만난다. 근두운을 타고 나는 제천대성을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포장도로에 들어서기 전 높아진 고도를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본다.

다행히도 인근에 작은 터가 위치했다. 잠시 샛길로 빠지듯 터로 나가본다. 굽이쳤던 15구간처럼 대청호 역시 곡선으로 요동친다. 건너편 대청호오백리길 7구간이 위치한 서탄리를 크게 휘감아 완성된 굽이침이다. 15구간에 위치한 주요 포인트 모두 서탄리를 감싼 대청호의 곡선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포인트 모두가 가리키는 아름다움은 모두 같지만 작은 시점의 차이는 절대 적지 않다. 서탄리를 감싼 곡선의 아름다움을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시원한 시야를 제공하는가 하면 다른 포인트에선 곡선의 자세함을 볼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서의 운치를 보여준다.

이곳까지 왔다면 고도는 사실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보면 된다. 각자의 매력을 제공하는 장소를 찾아 그저 멍하니 앉아서 다시 시작될 산행을 위한 휴식을 취하면 된다. 휴식을 끝낸 뒤 이번엔 내림이 시작된다. 한껏 올랐던 고조를 숨고르기 하면 된다. 작은 오르막이 두세 번 이어지지만 체력을 깎을 정도의 오름은 없는 만큼 어느 때보다 더 가벼운 발길을 이어가자.

약 2㎞를 더 가면 15구간에서 최고로 좋은 풍경을 자랑하는 독수리봉이 나온다. 독수리봉 푯말이 보이는 안쪽으로 약 10분만 가면 하나의 전망대가 나온다. 반대면 서탄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으로 바로 깎아 지르는 곡선이 한 마리의 악어 같은 형상을 한다. 충북 보은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독수리봉이 주는 경치를 최대한 즐겨보자.

◆속리산과 대청호의 교집합
독수리봉을 나와 15구간의 여정을 이어가면 분저리가 나온다. 분저리란 지명은 여말 명장인 최영 장군이 군량을 모아 가루로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눠주던 곳에서 유래됐다. 분저실이란 이름으로도 불렸다. 분저실 입구에는 폐교를 활용해 만든 ‘드림스쿨 예지원’이 위치해 과거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체험마을이 들어섰다곤 하지만 여느 시골과 같은 적당한 시골스러움을 내뿜는다. 분저리를 빠르게 통과한 뒤 등장하는 지방도 502번을 따라 걸으면 판장대교가 나온다. 말이 대교이지만 시골에서만 통할 정도의 다리가 나온다. 마을이 계속 이어지며 평범한 모습이 계속된다. 그러나 이곳의 공기를 크게 마시면 평범함이란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속리산자락과 대청호와의 교집합이 바로 이곳이어서다.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산행으로 차오른 기관지를 청소해준다.

산뜻한 공기로 평일에 도심 속 매연으로 더러워진 허파를 깨끗이 하고자 발걸음을 빨리 옮겨본다. 지방도 502번이 잘 포장된 만큼 걷는 데 무리가 없다. 판장대교를 건너 걷는 속도를 힘껏 올리니 어느새 15구간의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직선으로 길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된 구불길로 목적지가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지다를 반복한다. 여기서부터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구간의 마지막에 다다른다. 회남면 거교리다. 면치곤 제법 큰 규모의 마을이다. 거교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건 군대에서나 볼 수 있는 거대한 아치모양의 문이다. 아치모양 위엔 마을 방문을 환영한다는 문구가 있지만 문구가 없다고 한다면 영락없는 군대 입구다. 남자라면 모두가 느낄 만한 공포를 뒤로하고 아치의 대형 문을 통과하면 우체국은 물론 행정복지센터까지 등장한다. 면 단위의 마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규모다. 마을버스의 종점이기도 해 제법 많은 할머님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공식적으론 대청호오백리길 15구간의 마지막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체력이 남은 관계로, 그리고 조금은 아쉬운 마음에 인근 사담길이라 불리는 데크길을 둘러본다. 이곳은 원래 대청호가 생기기 전 금강 변에 위치한 네다섯 개의 마을이 있던 곳이다. 것다리, 날방 멱골, 본말 등이 모여 사담말로 불렸다. 마을의 유래는 조금 특이하다. 마을 앞 큰 다리가 있어 것다리란 마을이 생겼고 것다리 남쪽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이 지대가 높다해 날방이란 이름이 붙었다. 날방 옆엔 멱을 감을 수 있는 곳이 있다 해 멱골이, 그리고 이곳을 지나 본격적으로 마을이 시작된다 해 본말이 생겼다. 이런 식으로 마을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순차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부분의 마을이 통폐합됐고 작은 길이 조성됐다. 결국 마을이 모여 불리던 사담이란 말을 빌려 작은 길에 붙였고 현재는 작은 길을 데크로 조성해 작은 산책로를 조성했다. 사담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나름의 볼 것은 다 갖췄다. 전망대는 물론 작은 쉼터 두 곳 등이 조성돼 대청호의 작은 흐름까지 볼 수 있다. 아직 아무도 먹지 않은 까치밥이 감나무에 남아 삭막한 색상의 대청호에 생기를 넣는다. 약 20분 정도의 사담길 끝자락에 도착하면 거대한 벽화가 등장한다. 큰 담벼락에 형형색색으로 꾸며진 큰 그림이다. 곳곳의 담벼락마다 작품이 그려져 마음에 드는 벽화를 찾아 카메라를 꺼내는 재미도 있다.
벽화가 주는 재미까지 모두 즐기면 드디어 15구간의 비공식적인 구간까지 모두 즐긴 셈이다.

기사ㆍ사진=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영상=정재인 기자 jji@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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