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장빈과 선우 두 사람은 순임금이 말한 바와 같이 한실의 부흥에 힘쓴 고굉지신으로 주군을 위해 헌신할 모사요 책사이다. 그러나 나중에 석늑을 도와 후조를 건국하고 제갈공명의 예언을 완성시킬 인물은 우후 장빈이니 삼국지에서 활약한 어느 모사도 천하를 통일하지 못했지만 장빈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후조국(後趙國)은 중국대륙을 네 번째로 위조 이상의 광활한 국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장빈은 장비의 장자 장포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포가 공명을 따라 기산에서 위장 곽회 손례와 싸울 때 그들을 추격하다가 낙마하여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그때 장포는 머리가 깨지는 큰 부상을 입고 성도로 돌아가 치료하다가 사망하였다. 그 장포에게 아름답고 음전한 소실 이씨가 있었다. 이씨는 어느 날 여동빈이라는 무예가 출중한 선인을 꿈속에서 만났다. 여동빈은 이씨에게 서기(瑞氣)가 충만한 한 개의 구슬을 주었다. 이씨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구슬을 받아 쥐고 꿈을 깨었다.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그러나 그 꿈이 헛되지 않고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이씨는 꿈에서 본 구슬의 서기를 생각하며 아들의 이름을 빈(賓)이라 짓고, 아명을 주노라 부르고 자를 맹손이라 하였다. 

장포는 이씨의 몸에서 장빈을 낳고 다시 정실에서 장자 장실과 막내 장경을 보았다. 장실은 자를 중손이라 하고 장경은 자를 계손이라 하였으니 장포는 용호와도 같은 아들 3형제를 둔 것이다.

헌데 장포의 아들 3형제가 모두 범상치 않아 용력이 뛰어나고 사람 가운데 머리가 될 만하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장빈이 인중용(人衆龍)이라 할 만하였다. 장빈은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기어 고금전적(古今典籍)을 모두 섭렵했다. 그는 이름난 문장은 한번 읽으면 외우고 경서도 두루 통달하여 오기와 손빈의 병서에도 두루 통달했다. 그러나 장빈이 첩의 아들이라 하여 장포는 그를 남의 집에 맡기어 길러야 했다.

대장군 강유는 장빈의 뛰어난 기재를 미리 알아보고 부중으로 불러 만나보았다. 강유는 장빈의 빼어난 외모와 막히는 것이 없는 이론에 감복하며 혼자말로 중얼거리기를
‘이 아이는 내가 판단할 아이가 아니다. 훗날 큰일을 해낼 것이다.’

강유가 장빈의 기재를 알아보고 사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첩의 자식이라 부중에 두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그러나 강유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장빈을 찾아가 물어보면 신통하게도 장빈은 방책을 들려주었다.

‘내가 제갈승상에게 전수받은 모든 것을 장빈에게 물려주리라.’

강유는 그렇게 다짐하고 작정하더니 시가 차고 때가 무르익자 공명이 남긴 유서를 모두 장빈에게 물려주며 당부하기를

“빈아! 너의 기재는 나보다 열배는 더 위 길이다. 훗날 반드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날을 위해서 더욱 분발하여라. 대기는 만성(大器晩成)하는 법이란다. 부디 몸을 삼가고 귀히 여기며 더욱 정진하여라.”

“대장군님의 은혜가 하늘보다 더 높습니다. 내리신 훈계의 말씀을 살아 숨 쉬는 동안 잊지 않고 명심하여 지키겠습니다.”

장빈은 강유의 훈계 때문인지 자기 재주를 감추고 내색도 하지 않고 입신공명을 서두르지 않았다.

AD263년 촉한 염흥 원년에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나라가 망하였다. 그 해가 계미년으로 신라는 미추왕 2년이고, 고구려는 중천왕 16년이며, 백제 는 고이왕 30년이었다. 그리고 위원제 경원 4년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촉한의 신하들이 피난을 떠나면서 장빈에게 함께 가기를 권했다. 그러나 장빈은 따라가는 것을 피하고 말하기를

“내가 생각한 바 있어 점을 쳐보니 나라의 운수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소. 앞으로 적장이 반드시 스스로 망할 것이오. 그때 준비가 있어야 할 줄 아오. 이 몸은 아직은 여기 남아 있을 테니 여러분은 뜻하신 대로 행동하시오.”

장빈은 그날 이후로 초려(草廬)에 숨어 살며 바깥출입을 삼갔다. 장빈이 이와 같이 깊은 생각을 가지고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또 한 사람 특출한 기재가 촉한에 있었으니 그는 제갈선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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