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밥 에드워드(Bob E. Edward) 중령은 1950년 9월 23일, 17장의 사진을 미국 워싱턴으로 보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겁이 났던건지 모두 멀리서 뒷모습을 보인 채였다. 아니다, 라이카 카메라 특성상 아주 멀리 서 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죽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정확히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단 한 장의 사진 속에 서 있던 한 남자만큼은 처연히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정확한 피해자의 얼굴이 나온 유일한 사진이었다. 찍으면서도 놀랐을 그 사진은 1999년 12월 재미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찾아 한국에 전했다.

그리고 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의 뚜껑이 열렸다. 사진 속 처형(Execution)이라는 문구는 선명하게 이 곳이 어디인지 암시해주고 있었다. 몇 주만에 최대 6900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골령골이었다. 에드워드 중령은 그해 7월 자행된 2차 학살의 어느 날을 담은 것이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중 최대 규모였다.

세월이 지나 그 사진 한 장을 들고 일흔의 할머니 한 분이 가슴에 품고 다니던 아버지의 사진 한 장과 함께 가져왔다. 일제강점기 때 군서기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해방되고 나서 기자로 일하셨다가 1950년 12월 밥을 한 수저 뜨다 말고 6개월 된 막내를 품에서 내려놓고 무릎까지 눈쌓인 길을 두 사람에게 끌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뒤돌아 본 마지막 모습이 가슴에 박혀 살았는데 학살 현장을 담은 사진 속의 카메라를 돌아보던 남자의 모습이 제 아버지와 똑같은 것 같다는 것이다. 닮아있었다. 돌아가실 때가 31살이셨다는데 나이에 비해 애때보인다는 생각은 들지만 많이 닮았다.

아버지가 떠난 뒤 면회를 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고 했다. 고작 6살 여자 아이는 그 뒤 억척같이 살았다. 2대 독자를 잃고 할머니는 그해를 못 넘기셨다. 할아버지는 자살하셨다. 어머니는 재혼하시면서 막내만 데려갔단다. 남동생은 고아원에 보내고 자신은 식모살이를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고아원에서 남동생을 데려왔고 형편이 나아지자 막내동생도 데려와 키웠다. 평생을 그때 떠난 아버지가 어디 계실까 싶은 맘을 버린 적 없지만 사는게 바빴다. 어느 날 신문 속 남자 얼굴을 보자 가슴 속 응어리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기자였기에 본능적으로 셔터소리에 반응하셨을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아버지 품에 안겨 여자도 반드시 배워야한다고 들으며 컸으나 이 힘겨운 짐, 어디 맡길 곳이 없어 학교는 1년이 고작이었다고한다.

“할머니 건강하십니까?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록은 1월 겨울이었고 사진의 사건은 7월이라 동일인물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고 하지요? 그 시절 누가 그리도 꼼꼼히 적었다고 기록 한 줄로 결론을 성급히 낸건지…아직도 사진 두 장 들고오셔서 보여주시는지요. 저는 그 분이 아버지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많이 닮으셨어요. 적당한 지 모르겠으나 할머니, 저희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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