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대포장을 자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시작됐다. 과대포장이 자원낭비를 통한 에너지 효율화에 역행할 뿐 아니라 막대한 쓰레기를 배출해 처리하는 데 사회적 비용이 발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대포장은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정도가 심해지는 추세이다. 아무리 국민적 캠페인을 벌이고 공익광고를 하며 의식을 바꾸려 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명절 무렵 택배를 통해 선물이 대량 유통될 무렵이면 과대포장은 극에 달한다. 평소라고 과대포장이 수그러드는 것은 아니지만 설과 추석을 앞두고 선물을 할 때는 유난히 그 정도가 심해진다.

내용물은 보잘 것 없더라도 포장은 몇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 포장의 크기도 점차 커지고 있다. 그로 인해 차량에 한 번에 실을 수 있는 물건이 제한돼 사회적 비용은 한 차례 더 증가한다.

음식을 차릴 때도 먹지 않을 음식까지 상에 가득 채워야 하고 선물을 할 때도 갖가지 포장을 몇 겹으로 싸서 해야 하는 것은 법으로 제어할 수 없는 국민 의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선물 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생각해보면 받는 사람 위주가 아닌 주는 사람 위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받는 사람에게 얼마나 유용하고 실용적인가의 여부는 항상 후순위이다.

주는 사람이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포장을 해서 선물하는 물건이라야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명절 선물뿐 아니라 평상시에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격이 비싸고 포장이 화려한 선물을 했을 때 주는 자는 자신의 체면이 산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받는 자 입장에서 실용적이지 못하고 포장만 요란한 선물은 원하는 바가 못 된다.

어떤 경우 이렇듯 주는 자 중심의 선물은 받는 자에게 불쾌감이나 불편함을 안기기도 한다. 정작 받는 사람의 생활수준이나 기호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주는 사람의 체면과 입장만 생각할 때이다.

명절이 끝나고 폐기물 처리장에 쌓이는 포장지 양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서 한숨이 절로 난다. 인간의 체면과 욕심이 썩어가고 늙어가는 지구에게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의식을 바꾸자는 공익광고도 오래 했고, 캠페인도 오래 했다. 그러나 과대포장은 날로 심해져갈 뿐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엄정한 법 적용을 통해 개선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사실 포장을 많이 한다고 해서 법으로 심판하는 일은 어쩌면 유치한 발상이다. 스스로 환경을 생각하고 합리적 소비를 생각해서 자중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안 되니 이젠 엄정한 법을 동원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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