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위해 목숨 바쳤던 충청의 산림 유학자들

유계의 덕행을 위해 부여에 설립된 칠산서원. 출처 : 충청남도문화재대관

최근 충청의 미래정체성을 확립하여 범충청권 공동 브랜드를 구축하고 ‘세계 속의 충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역사적으로 환황해 문명교류의 중심지이자, 한반도 동서 및 남북교류의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충청권에 대한 새로운 시대적 비전을 고민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충청의 정체성을 논의하는데 ‘충청도 양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흔히들 충청도를 일컬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외적의 침략 앞에서 자신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청의 산림 유학자로부터 비롯된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

유교문화가 절정을 이룬 17세기, 주도적인 위상을 점하는 유학자들은 기호, 그 중에서도 충청권 지역 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율곡의 학맥을 전수받은 충청 산림은 김장생 부자와 중첩적인 사제관계를 맺으며 당시 사상계를 주도해갔다. 예학(禮學)이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과거보다 경학(經學) 중심을 보였으며, 민생안정책을 강구하였다.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권상하 등 자타가 공인하던 충청 산림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하지만,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 중의 선비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과거를 치르지 않아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도 유림의 추앙을 받았다. 정계를 떠나 있어도 정치에 무관심하였던 것은 아니며, 정계에 진출하여서도 항상 산림(향촌)에 본거지를 가지고 있는 조선후기 특유의 존재였다. 이들의 명성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려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학문수양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과거급제를 통해 관료가 된 사람들 보다 더 존중받았다.

17세기의 산림으로 현재 조사된 38명 가운데 충청도가 배출한 인물은 김장생(연산), 박지계(신창·아산), 강학년(연기·회덕), 김집(연산), 조극선(덕산), 송준길(회덕), 송시열(회덕), 권시(유성), 윤순거(노성), 이유태(금산·공주), 유계(금산), 윤선거(노성), 윤원거(노성), 송기후(회덕), 이상(전의), 윤증(노성), 권상하(청풍), 이기홍(연풍) 등 18명으로 거의 절반에 이른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위상, 정치적 역할, 사회적 지위 등은 어떤 인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노소분기(老少分岐)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들을 아우르는 충청유교라는 테두리에서 충청 산림의 의미를 탐색하지는 못했다. 300~40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충청유교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선비문화를 꽃피웠던 충청 산림에 대한 관심과 꾸준한 연구가 필요하다.

 

문광균(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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