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조재도 시인

 

엄마의 새 친구들

이봉환

늙은이가 꼿꼿한 집은 젊은 사람이 꼭 아픈 벱이여

이 말씀의 뜻 한번 야무지게 바꾸어보시려고

엄마는 하루하루 남다르게 낡아가는 것 같다

오늘은 고추 빻고 참기름 짜러 읍내 방앗간에 간다

실한 고추가 다섯 가마 참깨 알들 두어 되

저것들 낳고 키우느라 흘린 땀방울이 붉어서

고춧가루 이만큼은 매큼해졌으리

새마을 참기름 집에 새벽부터 줄지어 선 어매들

삭신을 쥐어짜듯 겨우겨우 빠져 나와서

참기름도 저리 고소해졌으리라

집안의 젊은 것들이나 부디 건강하라고

작정하신 몸뚱이는 깻묵처럼 날로 쪼그라드는데

마을 가시면 저 어매들 새로 사귄 친구들이 참 많다

특히나 엄마는 거미하고도 절친이어서

안방에 들어와 집도 지으라고 허락까지 하셨다

함석지붕의 붉은 녹들 혼신으로 엄마를 향해 번져가고

걸레도 바짝 당신 가까이서 같이 말라가고 있는 걸 보면

개미떼랑 먼지들 쓸어 내버리지 않고 곁에 두신 뜻을 잘 알겠다

그런데 들고양이는 또 언제 사귀어두셨나

저녁밥 먹고 창문을 한참이나 긁던 녀석

엄니야아옹- 기척하고는 어둠 속으로 흘긋 사라진다

염원의 손길 무수히 스치어간 서낭당 옆 돌장승의 코는
뭇 어매들의 간절한 소원이 모두 한결같아 맨들맨들해졌다

▣ ‘수청무어(水淸無魚)’라는 말이 있지요. 맑은 물에 고기가 꾀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시의 첫 행 ‘늙은이가 꼿꼿한 집은 젊은 사람이 꼭 아픈 벱이여’는 그보다 어조가 한층 더 강하군요. 사람이 늙어서까지 너무 깐깐하고 까탈스러우면 안 된다는 말인데, 그래서인지 시골 사는 어메들 하는 일 하나하나가 다 그 집 젊은 자식들 아프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어머니도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하루하루 늙어가다 보면, 때마다 새로 사귀는 친구들이 참 많습니다. 봄에 모종한 고추 여름내 자라 가을이면 따서 말리느라 고추와 친구하고, 밭둑에 심은 참깨 때 되면 거둬들여 가을볕에 말렸다 방앗간에 가 참기름 짜오느라 참깨와도 절친입니다. 친해지지 않으면 해먹기 어려운 일들이지요. 난리 블루스 추듯, 아주 진절머리 날 정도로 친해져 한 몸뗑이가 돼야, 그나마 아픈 삭신에 한 해 농사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고된 노동에 ‘몸뚱이는 깻묵처럼 날로 쪼그라드는데’ 어느새 거미가 방안에 집을 지어도 그냥 둘 정도로 거미와도 친해졌습니다. 함석지붕의 붉은 녹들, 방안에 짜 놓은 바짝 말라가는 걸레, 눅눅한 방구석 갈라진 벽 틈새로 뽈뽈뽈 기어 다니는 개미떼들, ‘저녁밥 먹고 창문을 한참이나 긁다 엄니야아옹’ 하며 사라지는 들고양이. 이 모두가 하루하루 흙노동에 낡아가는 엄마의 친구들입니다. 평생 밭고랑에 엎드려 사신 어머니처럼 낮고 외지고 쓸쓸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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