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에서 나와 서산시청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교천이 있다.

대교천을 지나 300m를 가면 음암면 한다리 마을이 나온다. 그리고 한다리 마을 안에는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유명한 정순왕후의 생가와 김기현 가옥이 있다. 시도기념물 68호로 지정된 정순왕후 생가의 안내판에는 ‘측면 2칸, 정면 5칸의 몸채 좌우로 각각 3칸씩 달아내어 ㄷ자 형태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 지붕은 모두 홑처마 맞배 지붕을 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필자는 건축학이나 지리학에는 문외한이어서 이 고택이 가지는 공간적 입지나 건축 구조의 특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조선시대 역사를 공부했기에 이 고택에 유서깊게 서려 있는 충청유학사를 소개할까 한다.

중국 한나라의 학자인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 따르면 국왕을 보필하던 신하에는 여섯 부류의 올바른 신하 즉, 육정신(六正臣)과 그 반대인 육사신(六邪臣)이 존재한다. 육정신에는 성신(聖臣), 양신(良臣), 충신(忠臣), 지신(智臣), 정신(貞臣), 직신(直臣) 등이 있는데, 그 중 국왕에게 직언과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신하가 바로 직신(直臣)이다. 조선시대 직신의 표상이었던 인물이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인데, 정순왕후 생가가 바로 김홍욱의 집이다.

경주김씨 가문이 서산의 한다리 마을에 정착하게 된 것은 김홍욱의 증조부 김연 대이다. 그리고 경주김씨를 조선왕조의 핵심 가문의 하나로 성장시킨 인물은 김홍욱이었다. 17세기 전란기의 한 복판에서 태어난 그는 병자호란의 여파로 소현세자가 사망하고, 원손과 세자빈인 강빈(姜嬪)마저 사사되자, 강빈의 억울함을 풀고자 노력했다. 이 사건은 왕실종통에 관한 문제로 효종의 왕위 계승과 직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꺼내자 격노한 효종이 김홍옥을 하옥시켰고, 그는 친국을 받던 중 결국 장살되었다. 이른바 ‘강빈옥사(姜嬪獄事)’이다. 장살되기 직전 ‘옛날부터 언관을 죽이고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습니까? 제가 죽거든 제 눈을 빼내어 도성 문에 걸어 두면 나라가 망해 가는 것을 보겠습니다’라는 김홍욱의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하지만 효종의 스승이자 충청유학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이 김홍욱의 신원을 복구하고자 건의하였고, 효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718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1년 서산의 성암서원에 배향되면서 김홍욱은 조선후기 직신의 대명사가 되었다.

김홍욱은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해 경주김씨가 중앙정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높아졌다. 특히 그의 증손인 김흥경과 김용경은 영조대 각각 영의정과 참판을 역임했고, 증손녀사위인 윤봉조는 대제학을 지냈다. 이러한 경주김씨 가문의 영향력으로 인해 정순왕후를 배출하였다.

왕조사회에서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국왕에게 간언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생각과 판단이 왕조의 존립과 직결되어있는 전근대사회에서 신하의 쓴소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므로 성리학자, 특히 충청유학자들은 직신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정순왕후 생가는 이러한 직신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문광균(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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