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고택

충청유교 하면 김장생, 송시열, 윤증, 유계, 권상하, 한원진 등의 인물이 떠오른다. 이들은 17~18세기 성리학의 대가들로 한 시대의 사림을 대표하던 사람들이다. 한편 전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없지만 19세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해 전국적으로 저명했던 충청지역의 유학자도 있었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가 바로 그다.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에서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충청도 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정희는 19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로 국내는 물론이고 청국으로부터 두루 주목받던 인물이었다. 그 이유는 19세기 지식인계와 문단, 그리고 서단과 화단을 움직였던 학자이자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김정희가 이와 같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공간과 나이를 초월하여 조선·청국의 학자들과 교류했기 때문이었다.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로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면서 경화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부친 김노경이 순조대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중앙정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가문이 되었다. 이런 가문의 영향으로 김정희는 정조대 대표적인 북학파로 불리는 박제가 아래에서 수학하였고, 1809년에는 부친을 따라 청국 사행길에 올랐다. 당시 청국의 학계는 절서(浙西)지역이 중심이 된 부류와 북경의 옹방강(翁方綱) 중심으로 구성된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김정희는 청국의 4대 학자로 꼽히는 옹방강, 그리고 완원(阮元)의 문인들과 주로 교류하였다. 이는 그가 2달 정도 북경에 머물렀던 것에서 기인하였다. 김정희는 청국의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당시 최고조에 이른 고증학의 진수를 공부하였다. 북경학계의 원로이자 청국 제일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받았다.

귀국 이후 김정희는 북학파처럼 주자 성리학을 비판하지 않았으나, 왕수인(王守仁)의 양명학이나 원매(袁枚)의 시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정조 연간의 주된 흐름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화분야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진경산수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동기창(董其昌) 같은 명말 청초의 서화풍이 성행하였으며, 청대의 서화 경향이 유입되고 있었다.

대체로 기존의 조선후기 회화 경향과 새롭게 유입되는 회화 경향은 학문과 문학 분야의 경우만큼 상반된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드러날 정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김정희의 조·청 회화교류 성과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화단에 변화를 가져 왔다. 그 변화 중에 추사화파가 개창되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허련, 조희룡, 전기, 유재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1850년대 추사화파로 활동하며 당시 조선의 화단을 움직였다.

김정희는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안동김씨의 정치적 공세로 인해 정치분야에서는 제 뜻을 펴지 못했다. 그러나 청국 인사들의 교류가 바탕이 되어 기나긴 제주 유배 속에서 최고의 걸작이라는 ‘세한도’를 그려냈고,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업적은 19세기 중후반 지식인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문광균(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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