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독립선언 이끌어 3·1운동 불씨 만주 벌판 누비며 13년간 항일 투쟁

청산리 대첩 가장 큰 업적세워 생가지 1991년 성역화 복원착수 기념관 등 준공

조선시대 홍주(洪州; 홍성)는 차령너머 충청도 최대도시이자 물산이 풍부한 내포지방의 중심도시로서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이기도 하다.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홍성군에서는 고려 말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명언을 남긴 최영(崔瑩; 1316~1388)장군을 비롯하여 조선 초 수양대군의 찬탈에 항거하며 불사이군으로 단종복위를 노리다가 처형당한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成三問; 1418 ~1456), 일제강점기에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백야 김좌진(金佐鎭; 1889~1930)장군, 그리고 불교개혁과 독립운동, 문인으로 필명을 높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 등 홍성이 배출한 대표적 인물의 흉상을 조각하여 군청 뒷마당에 전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동상을 세우고, 이들의 생가지를 대대적으로 성역화하는 한편(2012.02.22. 홍성 홍주의사총 참조), 김좌진 장군 생가를 비롯하여 용봉산, 홍주성, 오서산, 만해 한용운 생가, 남당 항과 궁리포구 등을 ‘홍성 8경’으로 정했는데, 이와 같이 홍성군은 위대한 인물들이 태어난 고향으로서 우리 역사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IC를 빠져나와서 태안반도와 서산 A·B지구로 알려진 천수만을 향한 왼편 길가에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백야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은 서산~홍성간 국도 중 서산시를 향해서 약12km쯤 가면 홍성군 갈산면 소재지에서 왼편으로 서산A, B지구 614번 지방도를 들어가는 삼거리이기도 하다(충남도기념물 제76호).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4㎞쯤 들어가면 만해 한용운 선사의 생가와 만해 기념관이 있는데, 홍성군에서는 1991년부터 장군이 태어나서 성장했던 생가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이어서 2800평의 부지를 확장하여 백야공원 및 사당 백야사(白冶祠) 등을 지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이 장군의 생가이고, 오른편이 백야기념관인데, 생가에는 장군이 살았던 시대의 모습과 물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단층 기와건물인 백야기념관에는 장군의 독립운동에 관한 사진과 자료들이 사면 벽에 전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군이 사용하던 무기며 문헌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념관 뒤편 약간 가파른 언덕 위에는 학생들에게 장군의 독립정신을 일깨워주는 교육장으로 만든 백야공원과 장군을 추모하는 사당 백야사(白冶祠)가 있다.
백야사에서는 장군이 암살당한 음력 12월 25일에 제향하고 있다.

조선 고종 26년(1889) 이곳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균(金衡均)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김좌진은 개화파의 거물인 김옥균의 4종질이기도 한데, 그는 6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소년 김좌진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스승 김광호로부터 의병과 독립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국가관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15살 되던 1913년에는 비밀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 가입하여 독립군사관학교 설립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18세 때부터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기 시작했지만,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여의치 못함을 알고 1917년 만주로 떠났다.
김좌진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집에서 부리는 노비들에게 문서를 불태우고 해방을 시켜주었다고도 하는데, 그는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할 때까지 13년 동안 오로지 항일투쟁에 전념했다.

 

홍성군청에 마련된 김좌진 장군 흉상.

1918년 장군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중 한사람으로서 서명하였으며, 1919년에는 사관연성부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에 나서 이듬해 9월에는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군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31세 되던 1920년 10월 21일 이범석·나중소 등과 1600여 명의 독립군들이 서 러시아로 출전하는 가납(加納) 연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을 청산리 백운평으로 유인하여 3일 밤 3일 낮 동안 1254명을 죽이고, 200여 명을 부상 입히는 전과를 올린 청산리 전투인데, 이때 변변한 무기도 갖추지 못한 3000여 명의 독립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5만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서 아군은 전사 60명, 부상 90여 명에 그친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러한 공격적인 전투는 여간한 배짱과 의욕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로서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독립군들의 용기 이외에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의 헌신적인 지지와 성원이 함께 어우러져 이룩된 성과로서 나라를 잃고 절망과 좌절에 빠졌던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안겨준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로서 그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이 패전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의 만주 군벌들과 결탁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소탕작전과 한인 착취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군이 33세가 되던 1922년 당시 22세의 나혜국과 결혼하는 한편, 거점을 옮겨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했지만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만주 군벌 장작림의 방해로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1925년 장군은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세워서 사관양성에 노력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수석에 취임하여 만주지방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교육과 민생에 노력하다가 1930년 1월26일(음력 12월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의 정미소 앞에서 동지였던 박상실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는데, 이때 장군의 나이는 42세였다. 장군의 시신은 동지들에 의해서 비밀리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선산이 있는 보령시 청소면 장재리로 이장했다.

 

김좌진 장군의 복원 생가(왼쪽)와 사당 백야사.

한편, 최근 장군의 후손에 대한 적통논란이 일고 있는데, 1916년경 장군이 상경하여 노백린 등과 독립운동단체 광복단을 결성하여 활동하던 중 사직공원 뒤편에서 동지들과 모의하다가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담을 넘어 피신한 곳이 당시 장안에 유명한 기생 김계월의 집으로서 그녀가 다락방에 숨겨준 것을 인연으로 잠시 동거하면서 아들 김두한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또 다른 일설은 김좌진이 피신한 집은 궁녀 박 상궁의 집이었고, 그 방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방이었는데, 그녀가 장군을 책장 안에 감추어 주었다고 한다.
김좌진은 위기의 순간을 넘기고, 이후 모녀가 손수 김좌진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때 태어난 아기가 김두한이라고도 하고,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데도 장군의 후손임을 주장한다는 비난도 있다.
아무튼, 나라를 잃고 이역에서 방황하던 우리 민족들에게 가진 것이라곤 맨몸이나 다름없는 소규모 독립군이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대군을 물리치는 기적과 같은 결과를 만든 의욕과 애국심으로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듯이 국난을 겪을 때마다 슬기롭게 이를 극복해 왔던 우리 민족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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