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세 출가 ··· 조선 불교 개혁 주도 33인 민족지도자로 항일 투쟁 선봉
- 역작 시집 '님의 침묵' 문학사 한 획 북향 '심우장' 그의 정절 고스란히
- 1992년부터 생가지 복원 착수 성역화 사업 결실 ··· 홍성 8경 선정

매년 3월이 오면, 우리는 일제강점기 10년만인 1919년 전국적으로 벌인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잊을 수 없다.

일제의 헌병경찰체제하에서 오로지 태극기 하나만을 들고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은 3·1운동은 조금은 어리석고 성공할 수 없는 시위였지만, 전국적으로 벌인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과 저항을 세계에 과시한 민족정신의 발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 대신 외관상 문화를 장려하는 이른바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바뀌었고, 대외적으로는 역시 일제의 강압을 받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5·4운동을 촉발하고,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인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어 간디의 비폭력독립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기념관 전경.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나들목에서 622호 지방도인 A, B지구와 안면도 방향 길목에는 이곳 출신인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콘크리트 포장 길을 따라서 약10분 정도 직진하면 3·1독립운동을 주동한 민족지도자 33인 중 1인이자 불교계의 대표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사의 생가와 만해 기념관이 있다.
생가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편 산기슭에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전면 3칸, 측면 2칸의 작은 초가집이 싸리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는데, 초가집 양쪽에는 광과 헛간이 붙어있다.
바깥에는 따로 흙벽돌로 만든 화장실이 암울했던 당시 우리의 고단했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왼편 골짜기 가장 높은 곳에 만해 기념관이 있고, 생가와 기념관 사이의 공간은 만해의 애민애국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표석(標石)을 설치하고, 뒤편 산기슭에는 님의 침묵 등 만해가 남긴 시비를 세우는 등 공원이자 산책로로 꾸몄다.
고종 16년(1879) 8월 29일 이곳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잠방굴에서 몰락한 양반인 청주 한씨 한응준(韓應俊)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만해는 불교승려로서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키고 사찰을 장악하려고 하는 시도에 반대하는 한편,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3·1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한 후에도 신간회를 조직하는 등 민족독립운동을 하다가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렀다.
홍성군에서는 만해의 다양한 활동과 족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부터 폐허가 된 생가를 복원하고, 성역화 사업을 벌여 ‘홍성 8경’중 하나로 삼았다(2012.01.11.자 홍성 홍주성과 조양문 참조).

민족시비 표지석.
한용운의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본명은 정옥(貞玉), 자를 봉완(奉玩)이라고 하지만, 승려의 법호 만해(卍海 혹은 萬海)와 법명 용운(龍雲)으로 더 알려져 있는데, 그는 6세부터 한학을 배우고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던 그가 18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집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다시 출가를 했는데, 그는 당시 조혼풍습에 따라서 이미 14세 때 전정숙씨와 혼인하여 이미 아들 하나를 둔 상태였다.
그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오직 26세 때인 1905년 오대산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님을 통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것부터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만해는 백담사에서 머무는 동안 불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을 접하면서 근대사상을 수용하더니, 1908년 백담사에서 내려와서 일본과 러시아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문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첫째. 그는 승려로서 불교개혁에 앞장섰는데, 191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공포하면서 원종(圓宗) 종무원 이회광에게 불교 확장이란 미명하에 일본 조동종과 완전 연합할 것을 협약하자 그는 1911년 전라도 송광사에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 등과 궐기대회를 열고 이회광을 종문난적으로 규정하고 원종에 대응되는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했다.
1913년에는 불교종무원을 창설하고, 1917년 8월에는 조선불교회 회장에 취임하는 등 불교통합 반대운동을 벌이는 한편, 불교유신론을 집필하여 불교계의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불교유신론은 당시 한국불교의 침체와 낙후성을 통렬히 비판하고, 불교사상이 진보주의·평등주의·구세주의의 입장에 서야 함을 역설했다.
1918년에는 불교잡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불교 논설뿐만 아니라 계몽적 성격을 띤 글을 많이 발표했다.

만해 기념관에 있는 한용운 영정.
둘째, 독립운동가로서 만해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가 주축이 된 3·1운동에서 최린(崔麟)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지도자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만해는 경찰 조사에서 변호사의 선임은 물론 일체의 사식과 보석을 거부했으며, 일본인 검사의 신문에 대해서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하여 제출하는 등 굳은 의지를 보였다. 만해의 조선독립이유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이해와 민족의 독립 근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제시했는데, 이 글은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독립신문(1919년 11월 4일자)에 부록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출소한 이후에도 민립대학 설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에 취임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 결성에 적극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으며,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으로 취임했다.
또, 같은 해 김법린·최범술·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1936년 신채호의 묘비 건립과 정약용 서세100년 기념회 개최에 참여했다.
광주학생운동 때 다시 1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기념관 입구 안내판과 복원 생가.
셋째, 만해의 문학에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데, 그는 47살 되던 1926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에 은둔하면서 88편의 시를 모은 대표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그의 문학 활동은 시에서 출발하여 시조와 한시 및 〈죽음〉·〈흑풍〉·〈후회〉·〈박명〉 등의 장편소설로까지 확산되었으나, 가장 유명한 님의 침묵에서 '님'은 연인·조국·부처 등 다의적인 의미를 가짐으로서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당시의 민족적 상황을 가장 압축적으로 상징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님의 침묵은 당시 상황을 시적 주체인 '나'가 님과 이별하여 님이 부재하고 침묵하는 시대로 규정하면서도, 님이 부재한 상황을 통해 '나'가 진정으로 님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변증법적인 진리를 드러내고, 새로이 '나'가 님과 합일될 수 있다는 낙관적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해는 평생 집 한 채 없이 지내는 것을 본 벽산 스님이 토지를 내놓고, 조선일보사에서 지어 준 성북동 집에서 살다가 1944년 6월29일(음력5월 9일) 66살의 나이로 병사했는데, 그의 성북동 집은 본성회복의 길을 ‘소를 찾는다’는 것에 비유한 불교경전에서 취한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한다. 만해는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도 싫다며 북향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망우동에 부인 유씨와 같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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