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일 정치부장

‘민족(民族)을 사랑하신 님은 조국독립(祖國獨立)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으셨네.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영원한 삶의 의지를 다지리라.’

최 일 정치부장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애국지사 묘역’으로 지칭했지만 최근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에 따라 명칭 변경)에서 영면(永眠)에 든 최경호(崔京浩) 선생(1898~1985). 그의 묘비에는 묘역을 찾은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거쳐 독립군 활동을 한 그는 한일병탄(韓日倂呑) 2년 후인 1912년 부친 최재중(崔在重) 선생을 따라 강원 울진(현 경북 울진)에서 중국 서간도(西間島)의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했다.

최경호 선생은 1917년 통화현(通化縣)의 동진학교(東晉學校)를 졸업했고, 1920년 신흥무관학교(1911년 서간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강습소’로 출범해 1913년 ‘신흥중학교’,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나와 독립군의 항일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제1지휘부 제2중대 제2소대장으로 활약했다.

청년 시절 이국(異國) 땅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사선(死線)을 넘은 그의 공훈(功勳)은 광복 50주년 기념일인 1995년 8월 15일이 돼서야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사후(死後) 10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공적을 받들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한 것이다. 역사 속의 뒤안길로 묻힐 뻔했던 최경호 선생의 발자취가 베일을 벗은 건 그의 아들인 최준성(崔俊成) 박사(1931~1997, 전 충남대 철학과 교수)의 수십년 간에 걸친 줄기찬 노력의 결실이었다.

최경호 선생(왼쪽)과 최준성 박사.

부친의 나라사랑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1950년 11월 서울대 재학 중 입대, 1955년 10월 육군 대위로 전역)해 최전선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국을 지켜낸 최 박사는 조국독립에 기여한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1970년대 말부터 최경호 선생이 중국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투쟁의 흔적을 찾으려 부단히 애썼다.

최 박사는 일본에 직접 건너가 마이크로필름에 저장돼 있는 일제강점기 당시 중국 만주(滿洲)에서의 항일 무장조직 관련 사료(史料)를 발굴해 부친의 활동상을 일일이 확인하고, 부친이 중국 통화현에 거주하던 시절 촬영된 희귀 사진자료 등을 찾아내는 노력으로 국가보훈처를 감복시키며 문민정부 출범 후 광복 반세기를 맞는 뜻깊은 시점에 맞춰 최경호 선생의 업적을 정부로부터 공인(公認)받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여 드린 대업을 마무리한 최 박사는 1년 후 경기 용인에 있던 부친과 모친 이경옥(李京玉, 1901~1979) 여사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시켜 드렸고, 1년이 지난 1997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8월 14일, 운명처럼 이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나의 사랑하는 할아버지 최경호 선생, 아버지 최준성 박사. 오늘의 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신 두 분의 은덕(恩德)을 떠올리며 내 나라, 내 조국의 소중함과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을 되새기는 광복절 아침이다.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최경호 선생 묘역. 최 일 기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최경호 선생 묘비. 최 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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