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한실 말엽 이래 군웅이 할거하여 분열이 심화되어 국가가 국가다운 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진은 AD 265년에 즉위한 진제 사마염의 집권 시기를 제외하고, 황권은 계속 약화되었다. 황권의 약화는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야심가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었다. 살인·약탈·방화가 빈번했다. 결국 국가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런 국면을 조성한 원인은 진제 사마염이 3가지 저급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첫번 제후왕을 분봉한 것이다. 사마염은 황제에 즉위할 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경력이나 견식에 일천했다. 그는 자신의 조손3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종실의 역량이 박약했고 강한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주나라의 분봉제도를 따라서 종실의 27명을 제후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오나라를 멸하고 다시 조서를 내려서 지방군을 모두 다 해체하고 지방정부는 더 이상 군대를 관할할 권한이 없게 하였다.

‘봉건제도란 일단 한번 확립되면 반드시 제후왕의 세력을 꺾지 못한다.’

27왕들은 몇몇을 제외하고 뒤질세라 경제력과 군사력의 확장에 나섰다. 이에 중앙정부는 허깨비가 되어 가서 그들을 제어하기 어렵게 되었다. 진제 사마염이 죽자 제후 왕들은 각자의 이익을 위하여 16년에 걸친 내전을 벌였다. 국가는 졸지에 피비린내 나는 투쟁에 말려들고 백치황제 사마충이 그 실권을 황후 가남풍에게 내어 주자 혼란은 더욱 더 가중되었다.

이를 돌이켜 보니 서진이 통일국가의 기능이 돋보인 것이 겨우 진무제 사마염이 집권한 1대에 불과했다. 진무제는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열락을 즐기며 후궁을 1만 명 넘게 두었다. 진무제는 초기에는 정사에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을 보살폈으나 황음에 깊이 빠져 정치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지방호족의 발호로 끊임없이 유민이 발생하였고 분권적인 통치가 형성되어 제왕들이 조정을 무시하고 군사력을 크게 확장하는 데 혈안이 되어버렸다.

‘제왕들이 권력을 희롱하며 날뛰는 세상이 벌어지고...’

이들 제왕들은 봉토와 2만호에서 5천호 식읍을 받고 군대를 가지고 각종 장군직과 도독의 직책을 겸하여 지방군부의 병력을 장악했다. 이것은 나중에 진무제의 뜻과는 달리 분권적인 경향을 가속화하여 8왕의 난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으로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다 무제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외척 양준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상의 부패가 가속화되었다.

‘삼양의 매관매직이 사마씨 정권의 멸망을 부채질하였다.’

양준과 양요 그리고 양제 3형제를 삼양(三楊)이라 불렀다. 이들은 뇌물로 정치를 전횡하였다. 그래서 개국공신들을 추방하고 조정과 궁중의 요직에 자신들의 심복을 배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귀족들은 사마씨 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양준은 진무제의 황후인 양황후의 아버지로 자를 문장이라 하였다.

양준이 임종이 가까운 무제 곁에서 밤을 새워 간병을 하자 무제가 병석에 누워서 양준을 가까이 불러 이르기를

“짐의 명이 경각에 다다른 것 같소. 태자의 일을 경에게 부탁하니 경은 내 뜻을 저버리지 말고 충성을 다하여 주시오. 후사는 내일 여남왕 사마양을 불러 맡길까 하오.”

이에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부디 심려치 마시고 용체를 보존하시어 억조창생의 바람을 헛되게 하지 마옵소서. 소신은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입니다.”

무제는 겨우 고개를 끄덕인 채하였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5세로 재위 25년이니 태강 11년 경술 4월이었다. 무제가 붕어하니 양준은 망극지통(罔極之痛)한 표정을 지으면서 딸인 양황후와 상의하여 매사를 다 처리해 나갔다. 진무제가 붕어하고 다음날 아침 양준은 황후의 명으로 태자와 백관을 불러 국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무제의 칙지를 거짓으로 꾸며서 태자 사마충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하여 사마충이 등극하여 진혜제라 하고 연호를 연희 원년이라 고쳤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