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조선시대는 한마디로 유학의 시대요, 중국 숭상의 존화(尊華)시대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 민족 고유의 철학과 역사는 이런 것들에 의해 능멸되다시피 하였다. 당시 유학자들에 의해 능멸당한 우리 민족사를 되찾고자 일생을 바친 민족사가가 있었으니 바로 규원사화를 쓴 북애자(北崖子)이다.

▲ 북애자(北崖子)는 누구인가

본명은 밝혀지지 않고 별명이 '북애 노인'이라는 뜻의 북애자(北崖子)인 그는 조선 숙종 원년(1675)에 저술되었다고 전해지는 규원사화의 저자라는 것 외에는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북애자는 규원사화 서문에서 자신은 효종, 숙종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로 소개하고 임진, 병자 양란의 치욕을 씻고 우리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으로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그 동기를 밝혔다.

▲ 규원사화는 어떤 책인가

규원(揆園)이라는 책이름은 북애자가 지금의 북한산인 부아악(負兒岳)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서문,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 만설(漫說)로 구성된 이 책은 당시 유학자들과 관료들의 존화사상과 사대사관을 비판하면서 그들이 외면해온 우리 민족의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 민족의 상고사와 단군의 역사를 재구성한 역사책이다.

지면관계상 규원사화의 개략만 살펴보면, 조판기편에는 환인(桓因)에 관한 내용, 태시기편에는 환웅(桓雄)에 관한 내용, 단군기편에서는 제1대 왕인 환검(桓儉)으로부터 마지막 왕인 47대 고열가(古列加)에 이르기까지 1195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서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적이 많은 왕은 제1대 환검(桓儉)이다. 그는 환웅의 아들로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에 박달나라 임금(檀君)이 되어 수도를 길림(吉林)에 두었으며 9개국과 12개 소국을 거느리고 그 영토는 멀리 요서지방에까지 미쳤다.(중략) 끝으로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만설(漫說)편에서는‘우리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지리(地利) 즉 잃어버린 만주 땅을 되찾는 것이고, 둘째는 인화(人和) 즉 당쟁을 버리고 단결하는 것이고, 셋째는 보성(保性) 즉 우리 풍토에 맞는 고유문화의 장점을 지니면서 남의 장점도 받아들이는 일이다.’라고 주장하였다.(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북애자의 북벌론(北伐論)

조선이 청(靑), 야인(野人), 왜(倭)와 연합하여 중국(명나라)을 정벌하고 우리의 고토(古土)를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청(靑), 야인(野人), 왜(倭)가 모두 우리와 같은 동이족(東夷族)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북애자의 주장은 규원사화의 만설(漫說)편에 실려 있다. “나는 청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같은 조상이라는 것을 말하고 이해득실을 설명하여 조선과 더불어 요동, 만주, 유주의 땅을 함께 점거하자고 할 것이다. 북으로는 야인을 꾀어서 선봉대로 삼고, 왜와 연결하여서는 그 남쪽을 꺾겠다.

그런 다음에야 조선의 강함을 다시 회복하고 중국의 오만을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러한 북애자의 북벌론은 중국(명나라)을 주군으로 받들고 있던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볼 때 가히 쿠데타적이며 사문난적(斯文亂賊)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 북애자의 절규

△“한 줄기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 땅은 아니다! 우리 조상이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날이 그립고 오늘이 슬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규원사화 서문에서)

△사람들이 허문(虛文)에 빠지고 쇠약에 안주하면서 자기 나라의 도(道)를 버리고 송나라 사대부들이 남긴 찌꺼기나 씹고 있으며 자기 임금을 폄하하여 자기 임금을 남의 나라(명나라)의 신하로 보고 있다.(漫說에서)

△조선의 근심은 국사가 없다는 것보다 큰 근심은 없다.(중략) 우리나라의 경사(經史)는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거의 타 없어지고 후세의 고루한 학자들이 중국책에만 빠져서 헛되이 주(周)나라만을 높이 받드는 것을 의(義)로 여기고 먼저 제 근본을 세워서 자기 나라를 빛낼 줄을 몰랐다.(중략)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좋다.’고 했다. 오직 이 일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만일 하늘이 내게 장수를 누리게 한다면 이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또한 국사를 완성하는 선구적 역할을 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숙종 원년 을묘 삼월 상순, 북애 노인이 규원초당에서 서문을 쓰다,)

▲ 그렇다. 오늘의 우리는 국사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 북애 노인의 시대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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