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동춘당 전경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처마는 동춘당이다. 마치 라미네이트를 한 것처럼 고르고 단정한 석가래는 차분하며 양쪽 처마에 다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로 곱게 날아간다. 결코 화려하다 말할 수 없는 자그마한 별당은 동춘당 송준길의 공간이었다.

좁은 세 칸 집은 굴뚝이 없다. 그저 작은 구멍을 낮게 뚫어 연기가 낮은 곳에서 일찍 흩어지게 했다. 혹여 음식짓는 연기가 높이 올라 배곯는 사람들 맘 아플까 그리했다고 했다. 돌은 깎지 않고 자연돌을 그대로 사용해서 주춧돌을 삼았다. 담장은 낮아서 일꾼들도 어렵지 않게 올렸을 것이다. 가장 최소한으로 겸손하게 집을 짓는 큰 어른에 감동해 목수들은 석가래를 똑 고르게 날개를 제비마냥 주춧돌은 살짝 높게 담장을 든든하게 최선을 다해 마련해드린 것은 아닐까?

은진송씨 가문의 귀하디 귀한 자손은 1606년 지금의 덕수궁 옆 서울 시립미술관 자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4살 무렵 아버지와 대전으로 내려와 꿈많은 시절을 채워갔다. 사계 김장생에게 배웠고 친구는 한 살어린 송시열과 김경여였다. 지금으로 치면 딱지치기는 총리랑하고 구슬치기는 도지사와 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16살에 어머니를 잃고 송준길은 너무 슬퍼 병이 들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겨우 떨치고 일어나 과거 2차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죽음을 넘나드는 맘고생을 하고 과거시험을 포기했다. 이후 일생을 병을 친구처럼 다스리며 살아야 했다. 어찌나 약한지 친구이자 6촌지기였던 송시열이 당호를 지어줬다.
“제발 아프지 말고 봄과 같으시오. 친구.” 동춘당의 시작이었다.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63살 몸은 더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용히 은거하다가 비가 오면 도롱이를 쓰고 걷고 싶을 뿐이라는 동춘당은 죽음이 가까이 오는것을 느꼈다. 그 순간 상주 외가에서 죽어 묻어 준 어린 딸이 생각났다. 그 길로 상주로 내려가 아이를 찾아 대전에 데려와 묻어줬다. 떠나려니 노인도 무서운데 어린 것이 얼마나 두려울까 염려되셨기 때문이었으리라. 곧 유언을 남기고 동춘당이 떠나갔다.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작은 표석에 이름 석자만 새겨 두라.” 온통 따뜻한 선비를 동춘당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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