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사회부장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는 생각보다 꽤 길다. ‘지방자치’는 제헌헌법에 명시된 헌법적 가치로 1949년 지방자치법 제정으로 구체화됐다. 중앙집권적 통치 메커니즘에 길들여진 탓에,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를 비롯한 다양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많은 부침도 있었지만 그래도 뚜벅뚜벅 걸어왔다.

현재의 지방선거, 다시 말해 지역민이 직접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동시에 선출한 건 1995년의 일이다. 그간 7번의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르면서 지방자치에 대한 인식의 폭도 넓어졌다. 중앙정치권에 대한 의존, 이념, 지역구도 등 ‘한반도 분단’에서 비롯된 이분법적 흑백논리라는 고질병도 상당 부분 완화됐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아직 까마득하다.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자체가 중앙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해야 온전한 지방자치의 틀이 완성되는데 여전히 지자체는 많은 부분에서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지방은 인구적, 기후환경적, 지형적, 역사적, 문화적 특성이 다양하지만 모든 정책은 정부가 만들어내기 때문에 지방은 개별적 특성을 배제당한 채 실행만 한다. 정부가 기획하고 지시하면 지방은 그냥 따르는 식이다. 예를 들어 고용문제를 들여다보자. 서울과 대전, 대전 안에서도 각 구마다 경제 환경이 다르지만 고용대책은 천편일률적이다. 원인이 다르고 그래서 증상도 다양한데 처방은 하나다.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고 재원을 분배하면 지방은 그 돈을 받아 효과가 있을지 의문인 사업들을 진행한다. 물론 지자체가 지역 특성에 맞는 나름의 사업을 펼치기도 하지만 상당히 제한적이다. 자체 운용 가능한 예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전시의 재정자립도는 40% 아래로 떨어졌고 자치구의 경우 평균 20%에도 못 미친다. 지자체 스스로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는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30년 안에 전국 시·군·구의 37%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는 ‘지방소멸론’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문제 인식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 십 년이 지났지만 변화의 시도는 정부와 중앙정치권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다. 다행히 이번 정부에선 지방자치를 위한 분권에 적극적이다. ‘강력한 지방분권’을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을 약속하면서 지방분권개헌안을 제시했고 정부의 571개 사무를 지자체로 이양하는 지방이양일괄법, 자치분권의 근간인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 자치경찰제 관련 법안 등 후속조치도 이행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혁신도시 시즌2’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들은 중앙정치권의 직무유기에 발목 잡혀있다.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추진해 온 지방분권개헌안은 야당의 반대로 허무하게 폐기됐고 30년 만에 지방자치의 큰 틀을 바꾸는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지방이양일괄법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지방이양일괄법의 경우 1년 넘게 답보상태다. 선거제도와 사법개혁안을 담은 ‘패스스트랙 법안’을 둘러싼 여야 대립과 여기서 발단이 된 ‘조국대전’에 온 나라가 함몰돼 ‘자치분권’ 이슈는 실종상태다. 문 대통령의 임기가 절반을 넘어선 상황, 여기에 정치권이 내년 총선모드에 돌입하면 ‘자치분권’ 이슈는 관심에서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약 없는 허송세월에 전국 지자체와 의회에선 실망과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법개혁, 그리고 ‘조국’에 대한 관심의 100분의 1만이라도 자치분권이 조명을 받았다면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역사는 벌써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방자치’·‘자치분권’, 다소 무겁고 딱딱한 주제지만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당장은 아니라도 좀 더 빨리 ‘내 삶’을 바꾸는 정책들을 경험할 수 있다. 동네공동체의 활성화, 이에 기반한 맞춤형 정책들이 주민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그러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애착은 더 커진다. 자치분권 법안에 대해선 여야의 견해가 크게 다르지 않다. 꼬인 실타래가 조금만 풀려도 자치분권 법안은 지금 당장이라도 국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 20대 국회 일정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 총선에서 자치분권 공약이 또다시 나타나질 않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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