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적 불명확하나 백제말 창건 추정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전설 내려와
- 조계종 7교구 본사로 명맥 이어 덕숭산 선원 견성암·정혜사도 인접
- 1944년 도불화가 고암수덕여관에 정착 원형 복원 ··· 미술전시 공간 볼거리

삼국시대 중국에서 전래된 불교가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어느 분야에 미치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불교는 성리학으로 대체되던 조선 초까지 1000년 동안 왕실불교·호국불교로서 지배계층의 사상통합 기능을 했으며, 불교 스스로 통일신라 말 5교9산에서 알 수 있듯이 토착화되기도 했다. 특히 백제시대 웅진성과 사비성 등 2개의 왕도를 가졌던 충청지방에는 384년 침류왕 원년 중국 남조인 동진에 체류하던 인도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수입되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전부터 바다를 통한 민간교류가 빈번했음을 알게 하는 유적들이 많다(2011. 05.11. 충청도의 절 구경하기 참조).

수덕사 대웅전.
지리적으로 중국대륙과 가까운 태안반도에는 전통 민속신앙과 결부된 이러한 불교유적으로 우선, 태안읍 백화산 중턱의 ‘마애삼존석불(국보 제307호)’을 비롯해서 홍성 용봉산의 신경리 마애불(보물 제355호), 서산 마애삼존석불(국보 제84호),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 4면석불(보물 제794호)등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중국 산둥성 일대에서 석굴을 만들고 암벽에 부처를 새긴 기법이다(2012. 02.08. 홍성 용봉산 참조).
특히 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는 태안 마애삼존불은 현재까지 한반도 최초의 마애불로 평가받고 있는데, 대개의 삼존불이 중앙에 본존불을 두고 좌우에 보살이 협시하는 것과 달리 중앙에 보살을 배치하고 좌우에 부처를 배치한 독특한 모습일 뿐만 아니라 그 모습도 인도, 중국과 달리 두툼한 얼굴은 불교의 토착화를 말하고 있다.
또, 태안의 마애삼존불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예산 봉산면의 4면석불은 동서남북에 따라서 사방정토·아미타불·석가불·미륵불 등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불행히도 4구의 얼굴은 파손되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렇게 지천인 불교유적과 유물들은 지명에서부터 불교적 함의가 물씬 풍기는 예산의 가야산(伽倻山; 678m)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다.

왼쪽부터 수덕여관 전경. 수덕사 승가대학, 가야산 헬기장 전경.
백두대간의 속리산(1058m)에서 뻗어 나온 금북정맥이 서해로 잠기기 전에 빚은 충청도 서해안 최대의 명산 가야산은 백제시대에는 상왕산(象王山)이라 부르다가 신라가 삼국통일 이후 이곳에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이렇게 지명의 원천이 된 가야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오로지 한말 대원군에 의해서 불태워지고 자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이장한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나지막하지만 너른 내포평야에 우뚝 솟아있어서 실제보다 더 높아 보인다.
가야산은 동서남북 사방에 수많은 마애불 이외에 고란사지, 수덕사(修德寺), 개심사(開心寺), 보원사(普願寺址) 등 1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 범상치 않은 내력과 함께 오랫동안 내포의 진산(鎭山)이어서 통일신라 때에는 산 동쪽에 가야사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 현감이 이곳에서 봄·가을에 산제사를 지냈다.

1973년 가야산은 덕숭산과 함께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주봉인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옥양봉·석문봉·수정봉 등의 봉우리로 이어지는 가야산 지구에는 남연군묘를 비롯해서 가야사지, 옥계저수지, 상황사지, 보덕사, 쉬흔길 바위, 옥양폭포, 거북바위 등이 있고, 덕숭산 지구에는 천년고찰 수덕사를 비롯해서 환희대, 견성암, 금강암, 정혜사, 소림초당, 만공탑, 일주문, 여승당 등 국가지정문화재 5점, 지방지정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7점 등이 있다.

왼쪽부터 수덕사 백운교, 수덕사선미술관, 수덕사 법고각.
사실 수덕사는 사적기가 없어서 정확한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서는 백제 말인 위덕왕 35년(588) 진나라에서 불법을 연구하다가 귀국한 뒤 진평왕의 왕사가 된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대사가 중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달리 전해오는 이야기는 오랜 옛날 이곳 마을에 수덕이라는 도령이 사냥을 나갔다가 아름다운 덕숭 낭자를 만난 이후 밤낮 낭자만을 사모하다가 사랑을 고백했지만, 낭자는 도령에게 절을 지어달라고 부탁해서 지은 것이 수덕사라고도 한다.
아무튼 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대전~당진간 고속도로 수덕사IC로 빠져나가거나 예산읍에서 국도 45호선을 따라서 덕산 온천관광지구와 윤봉길 의사 생가와 기념관인 충의사를 지나 약1km쯤 가면, 오른쪽으로 가야산 중턱을 거슬러서 해미읍성으로 가는 길과 왼편으로 수덕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2km쯤 더 가면 된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가야산 남쪽 가파른 기슭을 따라서 금강문~사천왕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정통코스 오른쪽에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있다.
수미산을 상징하는 백운교를 올라가면 전면 3칸·옆면 4칸의 대웅전(국보 제49호)이 있는데, 대웅전은 일제강점기이던 1937년 해체·복원작업 때 발견된 묵서 기록으로 고려 1308년(충렬왕)에 건축된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록만으로도 현존 국내 최고의 목조건물이다.
대웅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충남도 지정문화재 제103호)과 7층 석탑(충남도지정문화재 제181호)·거문고(충남도지정문화재 제192호) 등이 있는데, 특히 10km 밖까지 종소리가 들린다는 6500근의 범종, 범종각의 목어(木魚), 남녀 음양의 조화에 맞춰서 큰 황소와 암소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법고각의 법고(法鼓), 그리고 전체가 구름 형상으로 색상이 화려한 운판(雲版)은 ‘수덕사의 4대 보물’이라고도 한다.

수덕사는 백제 의자왕 7년(647) 숭제 법사가 이곳에서 법화경을 강의한 이후 고승을 많이 배출한 전통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는데, 대웅전 왼편으로 올라간 덕숭산 중턱에 1928년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과 정혜사 능인선원이 있다.
정혜사는 조선 말 선풍(禪風)을 일으킨 경허(鏡虛)대사로부터 법명을 받은 만공(滿空) 스님이 1905년부터 이곳에 금선대를 짓고 스님들을 가르치다가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게 되자 1932년에 세웠다고 한다. 또, 수덕사는 1996년부터 승가대학을 개설했는데, 이처럼 선원과 강원을 두루 갖춘 사찰은 전국적으로 수덕사 이외에 합천 해인사·양산 통도사·순천 송광사·장성 백양사 등 5대 사찰 뿐이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참선과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선원(禪院), 불교경전을 교육하는 곳을 강원(講院), 계율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원(律院)을 두루 갖춘 사찰을 총림(叢林)이라 하고, 초대형 사찰, 즉 총림의 가장 높은 어른을 ‘방장(方丈)’이라고 하는데, 덕숭총림 수덕사에는 방장이 있다.

한편, 천년고찰 수덕사 입구에는 그 명성만큼이나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이곳에서부터 일주문까지 음식점과 민박촌이 즐비하다. 특히 제자와 함께 파리로 사랑의 도피를 한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의 고택인 수덕여관과 그가 1969년 동베를린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잠시 기거하면서 직접 새긴 추상문자 암각화 2점이 명물이다.
전통적인 동양화법을 탈피하여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터득하여 프랑스 화단에 한국미술의 수준을 자랑한 고암은 1944년 수덕여관을 구입하여 살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현재 수덕여관은 원형을 복원하여 각종 문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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