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장빈이 대답하자 방 안에서 다시 인기척이 나더니 동자가 댓돌을 밟고 내려와 대문 쪽으로 걸어왔다. 동자는 대문 가까이 와서 바깥의 동정을 잠시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그만 기겁을 하고 다시 안으로 종종걸음을 치면서 들어가더니 무어라 안에다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바깥의 사람은 알 수 없으나 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밖에 웬 장정들이 떼거지로 서 있습니다. 저들은 하나같이 몸이 장대하여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행여나 도둑의 무리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동자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방안 사람은 안에 기별을 넣고 재빠르게 장창 하나를 손에 쥐고 뜰로 내려왔다. 그러자 곧장 안채에서 두 장정이 긴 칼을 들고 호기차게 달려 나왔다. 대문 밖에서 이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장빈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주인장께서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고 장사꾼입니다. 저녁때 흑망판에서 도적을 만나 행낭을 모두 빼앗기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불빛 하나를 발견하여 찾아온 곳이 여깁니다. 부디 하루 밤 이슬을 피하게 해 주시고 굶주린 저희들의 배를 채워주시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주인은 장빈의 말을 듣자 그 말속에 점잖고 법도가 있어 보이자 마음이 움직여서 손수 대문을 열고 맞아드렸다. 장빈일행은 주인을 만나자마자 정중히 절을 드렸다. 주인은 동자에게 일러서 마음이 크게 눅어져서 손님들이 먹을 식사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음식이 준비될 때까지 쉴만한 방으로 안내했다. 주인은 장빈일행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마자 용모파악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밝은 불빛의 도움을 받아 장빈일행의 복식과 행동거지를 읽어보는 것 같았다.

주인은 한동안 장빈일행을 읽어 보고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말씨를 곱게 가다듬어 점잖게 묻기를

“공들은 어디서 오신 뉘시기에 이 밤중에 이곳을 헤매고 있었습니까?”

“저희들은 모두 한중을 왕래하며 장사를 주업으로 하고 지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흑망판에서 도적떼를 만나 가졌든 행낭을 모두 빼앗기고 이렇게 헤매다가 귀인의 댁을 찾아와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실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인은 장빈의 말이 성에 차지 아니하여 다시 묻기를

“죄송하오나 공들의 존함을 알고자 합니다. 저는 왕복도라는 성명을 쓰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민가가 많았으나 워낙 외진 데다가 고을이 넓고 숲이 우거져 수년 전부터 도적이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그리 되자 사람들이 겁을 먹고 시달리다가 지금은 거의 다 타처로 떠나갔습니다. 시방 이 일대는 도적떼 때문에 폐허가 되었답니다.”

“귀인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저의 성명을 밝히자면 장문한이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저의 형제이고 친척들입니다.”

장빈은 지략이 뛰어난지라 이 짧은 시간에도 깊은 생각이 있어서 인지 자신의 성에다가 조염의 자를 갖다 대어 성명으로 삼아 말하였다. 그때 손 날래게 저녁상을 차려왔다. 성찬은 아니지만 김이 무럭무럭 나는 따뜻한 밥상이었다. 장빈일행은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드리고 몇 잔술로 목을 달래고 꿀 맛 같은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장빈이 주인에게 물었다.

“대인께서는 어찌하여 도적 떼를 피해 떠나지 아니하고 이곳에 남아 계시는지 알고자 합니다.”

“…… ”

주인이 선뜻 대답을 아니 하자 조개가 참다못해 말참견을 하기를

“혹시 대인께서는 도적 떼들의 소굴을 아시고 계십니까?”

장빈과 조개가 두 가지 궁금증을 말하자 주인은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이 몸이 비록 늙었으나 창법을 약간 익혔다오. 아까 안채에서 나온 두 청년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사는 진장굉이란 사람의 아들입니다. 두 청년은 무예가 비범하여 도적 떼를 제어할 수 있소. 여기서 20리 안팎의 토지가 다 진씨와 나의 땅이지요.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진씨와 나는 농사를 많이 지으므로 서로 자주 왕래하며 도와주고 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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