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병천면 범죄인명부 발견… 8명 ‘태형90대’
“유 열사 부친 중상에 헌병주재소 몰려가 항의”

유관순 동네 사람들 곤장 90대 맞은 이유는?
천안 병천면주민센터에서 발견된 용두리 유중하의 범죄인명부. 천안헌병분대로부터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대’ 처분을 받은 사실이 기재돼 있다.

1919년 4월 1일 천안 병천면 아우내 만세운동 때 유관순 열사 동네인 용두리 주민 다수가 즉결처분으로 태형(笞刑·곤장형)을 받은 사실이 처음 알려졌다.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는 “천안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천안독립만세운동 조사를 하면서 병천면주민센터에서 유 열사 등 병천면 시위 참가자 26명의 ‘범죄인명부’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이 명부를 살펴보면 징역 3년형을 받은 유 열사·유중무(유 열사 삼촌)· 조인원(조병옥 부친)과 달리 만세운동에 참여했지만,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고 천안헌병분대로부터 ‘태 90대’의 즉결처분을 받은 이가 여럿 있다.

주소지가 동면(후일 병천면으로 바뀜) 용두리인 유중하(당시 53세), 유중제(50), 유중춘(39), 유중대(23), 유용석(30), 김순명(51), 허춘화(53), 조병희(52) 등 8명은 시위 날로부터 15일이 지난 4월 16일 ‘태 90대’의 즉결처분을 받았다. 황상칠(26)은 4월 23일 ‘태 60대’ 즉결처분을 받았다.

임 씨는 “이들은 유 열사 아버지 유중권(당일 사망)이 크게 부상당하자 유열사·유중무·조인원과 함께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거세게 항의한 같은 동네 용두리의 고흥 유씨 종친 및 주민들”이라고 말했다.

당시 헌병주재소 주변 상황은 급박했다. 재판기록에 따르면 유중무는 헌병 칼에 옆구리·머리를 다쳐 빈사상태에 빠진 형 유중권을 등에 업고 주재소로 찾아갔다. 그는 헌병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할 것 같으냐. 때려죽이겠다”고 하며 거칠게 대들었다. 조인원은 상의를 벗어 던지고 주재소장 총을 잡으며 항의했다. 유 열사는 소장 옷에서 혈흔을 발견하고 소장을 붙잡고 흔들었다.

천안 병천면주민센터에서 발견된 유관순 열사의 범죄인명부.사망시간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호적에는 8시20분)로, 본명 한자가 통용되는 柳寬順이 아니라 柳冠順으로 기재돼 있다.

헌병 발포로 죽거나 다친 주민이 속출하자 흥분한 주민들은 주재소 유리창을 깨거나 유치장 벽을 파괴하는 등 다소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 시위 당일 아우내장터에선 19명이 사망했다. 이 때 용두리 주민들이 주재소로 몰려가 집단 항의해 많은 이들이 즉결처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범죄인명부는 신원조회용으로 읍·면·동에서 보관했으나 대부분 의무보관기간이 지나 폐기됐다. 병천면의 경우 다행히 행정구역 변경으로 이관 받은 동면·갈전면의 일부 명부가 남아있다. 3·1운동 당시 용두리는 동면 관내였다.

천안시는 범죄인명부를 통해 만세운동 처벌 사실이 밝혀지고 후손이 찾아진 5명에 대해 우선적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했다.

천안=조한필 기자 chohp11@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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