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영남지방 '대갓집' 형 구조, 조선후기 양반 주거 사료로 가치 높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3호로 지정 고택 주련 곳곳에 추사 필사본 전시돼

내륙에서 충청도 서해안의 불쑥 튀어나온 태안반도를 왕래하려면 인천에서 배를 타거나 아산~ 신례원~ 합덕을 거쳐서 꼬불꼬불 돌아가는 길이 유일해서 오랫동안 태안반도로 통하는 길목인 신례원~ 합덕읍이 크게 번창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장항선 철도에 신례원역을 세우는 것이 유일했으나, 1979년 10월 아산시 인주면과 당진시 송악면 사이의 바다를 막는 삽교방조제과 2003년 말 서해안 고속도로의 개통이후 태안반도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렇게 예전에 신례원에서 합덕읍으로 통하는 길목이던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조선후기 최대명필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고택(충남도지방문화재 제43호)과 그의 묘소(충남도지정문화재자료 제188호)가 있는데,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 당진IC나 해미IC를 빠져나와 예산 방향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경부고속도로 천안IC를 빠져나온 뒤 온양~ 신례원을 거쳐서 약4㎞쯤 갈 수 있다.

추사 고택 내부.

본래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가 둘째 공주인 화순 옹주가 출가하자 한양의 장동(현재 통의동)에 특별히 지어주었으나, 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月成尉 金漢藎: 1720∼1758)이 오위도총관을 역임하다가 39살로 요절하자 화순 옹주도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고 한다.
그 후 김한신의 집이 너무 거대하다는 비판을 받자 김한신의 고향인 예산으로 이축하면서 56칸으로 줄였다고 하는데, 추사고택은 조선후기 양반의 주거 모습을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여서 충남도지정문화재가 되었다.
사랑채, 안채, 사당, 묘소 등으로 나눠진 추사고택은 1976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08년 고택 주차장 옆에 추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관련 자료의 전시와 함께 기념품을 판매하는 추사 기념관을 지었다.

추사 영정.

고택 정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담장을 설치한 사랑채가 있는데,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ㄱ자처럼 배치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사랑채 댓돌 앞에 세워진 석년(石年)이라고 새긴 돌비석은 추사가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직접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좁은 돌계단을 지나 안채로 들어서면 마당을 중심으로 6칸 대청과 2간의 안방과 건넌방,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등을 갖춘 口자형인데, ㅁ자형 주택구조는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 구조라고 한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안채와 떨어져 ㄱ자형으로 지었다.
대청 뒤쪽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실 우리에게 서예가로 알려진 추사는 병조참판(종2품)과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가 철종 8년 71세로 죽은 정치가인데, 그는 정조 10년(1786) 6월 이곳에서 경주 김씨로서 경상감사와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당시의 가법에 따라서 자식이 없는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당시 김노영은 대사헌이었다.
추사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글씨 솜씨로 칭찬을 받았는데, 20세 전후에 이미 그 이름을 국내외에 떨치게 되었다.
박제가에게서 실학사상을 배운 뒤에는 고증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추사가 24살 되던 1809년(순조 9) 생원이 된 추사는 동지사겸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 연경으로 가는 생부를 수행하여 당시 연경의 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학문의 폭을 크게 넓히게 되었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명의 이학(理學)을 배척하는 것이었으나, 옹방강은 한·송(漢宋) 학설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 완원은 실사구시설를 비롯한 한학 체계의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학자인데, 추사는 영조~ 정조 때 조선실학의 학풍에 바탕을 두고 청의 학풍을 혼융시켜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왼쪽부터 추사 고택 입구 전경과 추사가 청나라에 가져와 고조부 묘 앞에 심은 백송이.

청에 다녀온 뒤 추사는 금석 자료의 수집 및 연구에 몰두하여 함흥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를 증명했고, 31세 때인 순조 16년(1816)에는 조인영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가서 진흥왕 정계비의 실체를 밝혀냄으로써 그때까지 막연하게 조선 태조의 왕사인 무학 대사비라고 여기던 학설을 뒤집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추사는 금석과안록, 진흥이비고와 같은 저술로서 금석학파 형성에 기여했는데, 당시 청나라에서 가져와서 고조부 묘소 앞에 심은 백송이 지금까지 살아서 천연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추사는 181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시강원설서·예문관검열을 거쳐서 1823년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암행어사와 의정부의 검상(檢詳)을 지냈으나,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되어 윤상도 부자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생부는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다.

왼쪽부터 추사에 관한 자료를 모아 지난 2008년 건립된 추사 기념관과 추사 김정희 묘소.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이던 추사도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가 득세하자 헌종 6년(1840) 윤상도의 모반죄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유배 길에 남원 ·구례 화엄사 보제루(普濟樓)의 편액 화장(華藏)· 쌍계사의 편액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 등 많은 글씨를 남겼다. 특히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교류한 사연이 유명하다.
추사는 유배된 지 9년 만인 헌종 14년(1848) 풀려났지만,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에 연루되어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났다.
이렇게 두 차례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친 추사는 벼슬을 멀리하고 생부 김노경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했는데, 완당(玩堂) ·추사(秋史)를 비롯하여 고향인 예산의 지명을 딴 예당(禮堂)·을 비롯하여 과천의 지명을 딴 과파(果坡)· 노과(老果) 등 아호가 200여 개가 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유명한 추사체가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추사는 고증학에 따라서 시·서·화 일치의 동일묘경(同一妙境)을 주장했으나, 화풍은 기법보다는 문인화풍을 따라 대나무와 산수를 그리면서 아름다운 필선을 보여주었다.
현존하는 작품 중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모질도(??圖)· 부작란(不作蘭) 등이 유명하고, 전각 분야에서도 추사각풍(秋史刻風)이라고 하는 독특한 영역을 수립하여 자신의 작품에 낙관으로 사용하였으며, 오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전국 곳곳에는 그의 글씨와 편액이 많이 남아있다.
말년에는 세상을 한탄하며 승려가 되었다고도 하는 추사는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4년 뒤인 1856년 10월 10일 71세로 죽었는데, 고택 왼편으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그의 묘소가 있다.
추사 고택은 추사의 명성 못지않게 많은 방문객이 찾는 유적으로서 지방자치 실시 이후 예산군의 적극적인 보호와 함께 예산문화원에서는 매년 10월 9일 추사고택에서 추사를 기리는 전국휘호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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