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흥선대원군 선친 이구의 묘, 입신양명 좇아 가야사 불태워 이장

도굴 후 천주교 박해·쇄국정책 계기, 고종 제위 후 보덕사 지어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만물일원론의 동양사상은 원시신앙과 도교(道敎)의 결합이지만,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아 세 나라에서 특히 발달된 명당론(明堂論)은 기본적으로 산·물· 위치(方位)·사람 등 네 가지의 조합으로 설명한다.
땅의 관상을 본다고 해서 상지법(相地法)이라고도 하는 명당론은 인체의 혈관을 따라서 영양분과 산소가 운반되는 것처럼 땅에도 경락과 같은 생기의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돌아다니는 생기를 사람이 접함으로써 복을 얻고 화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풍수설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혈(穴)은 생기가 뭉쳐있는 곳으로서 양택과 음택으로 나누는데, 음택은 시신이 직접 땅에 접해서 생기를 받는 곳을 말하고, 양택은 인체의 경혈과 같은 기능을 하며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말한다.
그런데, 혈관과 달리 경락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기(氣)가 온몸을 순행하듯이 사람은 땅의 생기에서 살면서 그 기를 얻고 망인은 땅속에서 직접 생기(生氣)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산 사람보다 확실하게 기를 얻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망인이 얻는 생기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친자감응(親子感應)이라고 한다.

명당인 혈(穴)을 찾는 방법 중 산과 관련된 상지법은 산맥을 용으로 보고 감추어진 정기가 흘러 다니는 통로인 진혈(眞穴)을 찾는 간룡법(看龍法), 바람을 가두어서(藏) 정기를 모으는 장풍법(藏風法), 물을 찾는 득수법(得水法), 또 주변과 상관관계를 살펴서 정기가 뭉쳐있는 혈의 위치를 찾는 정혈법(定穴法), 산의 모양이나 물의 흐름을 동·식물이나 사람 등에 비유하여 그 역할과 정기를 정하는 형국론(形局論) 등으로 나눈다. 특히 혈의 뒤를 좌(坐)라 하며, 좌에서 앞을 바라보는 향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는 양택이나 음택에서 최고로 치는 좌향론의 기본이다.

남연군 묘 옆을 지키는 수호석 석양.
이런 명당론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굳게 자리 잡았는지는 조선 말 대원군 이하응이 명당을 믿고 경기도 연천의 남송정에 묻었던 아버지 남연군을 예산 가야산까지 장장 500여리를 운구하여 이장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는데, 예산과 서산 사이에 있는 가야산(678m)은 속리산(1,058m)에서 뻗어 나온 금북정맥이 서해로 잠기기 전에 빚은 마지막 산으로서 백제시대에는 상왕산(象王山)이라고 불렀으나 통일신라 이후 가야사를 짓고 가야산이라고 고쳤다고 한다(2012. 03.28. 가야산과 수덕사 참조).
하지만, 지명변경의 원천이 되었던 가야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고, 덕산 온천과 수덕사로 가는 길과 고덕면으로 갈라지는 덕산면 소재지에서 샛길로 약3㎞쯤 들어간 가야사지에는 남연군묘(南延君墓: 충남도기념물 제80호)가 자리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선친 남연군의 묘. 흥선대원군은 입신양명의 뜻을 품고 아버지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가야산으로 이장했다. 봉분 옆에 석등과 오위도총관추증비가 세워져있다.
남연군 이구(李球)의 네아들 중 막내인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호를 석파(石坡)라고 하는데,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화를 배운 그는 특히 난을 잘 그려서 석파란(石坡蘭)이라 할 만큼 서화가 유명했다.
그러나 왕족이면서도 세도정치에 밀려서 안동 김씨들로부터 수모를 겪으며 살던 그는 18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묻었으나, 식객이자 이름난 지관인 정만인으로부터 가야산 북쪽에 2대 천자지지(2代天子之地)가 있고, 남쪽 오서산 아래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만대 부귀영화보다 2대 천자지지를 선택한 뒤 직접 현지를 답사해보니 그곳은 공교롭게도 가야사 5층 금탑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1840년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태운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작정했는데, 그 과정 역시 가히 파격적이었다.
가진 재산이 없던 이하응은 먼저 가깝게 지내던 판서 김병학을 찾아가서 그가 좋아하는 난을 그려 주고, 그 대가로 김병학이 가보로 전해오는 벼루를 얻어서 영의정 김좌근에게 선물로 준다. 그리고 김좌근으로부터 충청감사에게 가야사를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로 쓰는데 협조해주라는 편지를 받아들고, 마침내 가산을 송두리째 처분해서 마련한 2만 량 중 절반을 가야사 주지에게 주면서 절에 불을 지르도록 했다.

상여집과 남은들 상여.
한편, 1844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덕산까지 옮겨서 가야사 부근에 임시매장 했는데, 상여의 운구는 길가의 마을주민을 동원했다. 그때 사용했던 상여는 마지막 구간 운구에 동원되었던 덕산면 광천리 마을에 주어서 지금까지 남은들 상여(민속자료 제31호)’라 하여 보존되고 있는데,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얹는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갖게 한다.
현재 원상여는 수덕사~해미로 가는 가야사 기슭 도로변의 상여막에 있지만, 남연군묘 아래 상여막에는 예산출신 고건축대목장 전흥수씨가 만든 상여를 전시하고 있다.
아무튼 대원군은 남연군을 이장하면서 도굴을 염려하여 쇠 수 만근을 붓고, 또 석회를 비벼서 봉분을 만들고, 무덤 좌우에 석양(石羊) 2개, 돌망주 2기와 이대천자지지라고 새긴 석등까지 세웠는데, 그 음덕인지 7년 뒤인 1852년 이하응은 훗날 고종 임금이 된 아들 명복(明福 =載惶)을 낳았다.
그 후 철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철종의 6촌형 뻘인 이하응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 조대비에게 접근해서 둘째아들 명복을 철종의 양자로 삼게 한 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 명당론을 믿고 1840년부터 장장 30년에 걸친 프로젝트가 성공하여 12세에 임금이 된 아들 덕택에 이하응은 임금의 아버지가 받는 대원군(大院君)이 되어 이후 10년 동안 정권을 오로지 했다.

보덕사 전경(왼쪽)과 오위도총관추증비.
그런데, 고종 3년(1864) 2월 상해에서 장사를 하던 독일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충청도 해미에 도착해서 현감 김응집에게 통상을 요구했으나 실패하자, 재차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통상의 무기로 삼으려고 생각했다.
1868년 4월 18일 밤 미국인 Jenkins와 프랑스 신부 Ferron을 통역, 천주교신자로서 상해로 망명했던 최일선을 길잡이 삼은 도굴단은 내포 앞 바다인 행담도에 도착한 뒤 가야산 아래인 구만포(九萬浦; 고덕면 구만리)로 가려고 작은 증기선 Greta호로 갈아타고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지기의 저지와 신고를 받고 출동한 덕산군수가 포졸과 주민을 이끌고 달려오고, 무엇보다도 견고한 석회석으로 덮은 봉분을 파내지 못하던 중 썰물시간이 되자 철수했다.
그 후 Opert는 ‘금단의 나라, 조선에의 여행’이란 기행문을 지어서 조선을 서방세계에 소개했지만, 천주교도가 도굴단을 안내한 것이 드러나서 이후 대원군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주요원인이 되었다.

한편, 대원군은 아들이 임금이 된 후 1865년 가야사를 불 지르도록 한 것을 속죄함과 동시에 부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남연군묘에서 약2㎞떨어진 곳에 보덕사(報德寺)를 짓고 많은 전답을 주었다고 하는데, 보덕사는 6·25때 불에 탔으나 중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보덕사는 극락전(충남도유형문화재 제145호)과 가야사에서 가져온 고려시대의 석등이 있는데(충남도문화재자료 제183호), 이제 만대에 걸쳐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오서산의 명당을 찾아 나서는 무리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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