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연구소 ‘꿈꾸는다락방’ 대표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여파로 2월의 모든 강의 일정이 5월로 잠정 연기됐다. 뜻하지 않은 휴가를 맞게 된 나는 익숙지 않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됐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이 기회를 잘 보내보리라 마음먹었다. 평일 낮까지 맘껏 늦잠을 자고 TV 속 누군가처럼 커피 한잔을 들고 거실 창밖의 여유로운 풍경을 맞이하리라. 그동안 미뤄뒀던 영화도 책도 원 없이 보리라.

하지만 작은 바람은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무너져버렸다. 이제 입주한 지 2년 된 아파트는 새 주인을 맞느라 분주했다. 주인이 바뀔 집에서 들려오는 인테리어 공사 소음과 이사를 나가고 들어오는 이들의 사다리차 소리. 늦잠은커녕 소음을 피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사람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집을 찾아서 떠나는 것일까. ‘집’을 소재로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박제범 감독의 영화 ‘집 이야기’가 떠오른다.

영화 속 은서는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하며 혼자 살고 있다. 이사할 집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여러 집을 보여 줬지만 한 곳도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은서에게 부동산 아저씨는 “아가씨가 찾는 집은 내가 찾아줄 수 있는 집이 아닌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버린다.

마음에 드는 집을 찾지 못한 은서는 결국 아버지가 홀로 사는 고향 집에 잠시 머물기로 한다. 엄마와 이혼 후 가족이 모두 떠나버린 오래된 집에 아버지 혼자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창문 하나 없는 은서의 고향 집은 무뚝뚝해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똑 닮아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열쇠수리공인 아버지는 남의 집 문은 잘도 열어주는 솜씨 좋은 기술자지만 정작 가족의 마음을 열지는 못했다. 결국 아버지와 이혼을 선택한 엄마는 재혼해 제주도 바닷가의 그림 같은 집에 정착했고 혼전 임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듯 결혼한 은서의 언니도 아파트에 산다.

발붙일 곳 없던 은서는 고향 집에서 지내는 동안 어릴 적 그대로 남겨진 오래된 물건들에서 잊고 있었던 가족의 흔적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의 깊은 속내와 지독한 외로움과도 마주한다. 가족을 많이 아끼면서도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 은서가 온다는 소식에 깨끗한 수건을 새로 사고 은서가 좋아하는 복숭아 김치를 담그며 함께 살게 된 딸 은서를 맞는다.

크든 작든 집은 누군가의 보금자리이자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창의 크기며 커튼 색깔, 가구가 그렇고 침대 옆의 작은 소품 하나가 그렇다. 낡을 대로 낡아 초라하기까지 한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집에서 은서와 아버지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린다. 은서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집. 그렇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집은 바로 이런 집이 아니었을까.

영화 '집 이야기'는 과연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 질문을 던진다. 몸을 쉬게 하는 집, 마음을 쉬게 하는 집. 당신은 어떤 집에 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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