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생전 집터 '도중도(한반도의 가운데 섬)'라 명명

의거 前 소장했던 회중시계·일기 등 기념품 한자리

29일 상해의거 80주년 기념 '매헌 문화제' 개최

4월29일은 1932년 중국 상하이 훙거우 공원에서 중국 대륙을 강탈한 일본이 천황의 생일(天長節)을 경축하는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한국인의 기개를 세계에 보여준 윤봉길(梅軒 尹奉吉: 1908∼1932)의사의 의거일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35년 동안 질곡의 세월을 보낸 끝에 해방된 우리는 오로지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잊을 수 없지만, 특히 수억 명의 중국인들조차 좌절과 실의에 빠져 감히 일본에게 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기에 윤봉길 의사가 보여준 용기는 한반도와 중국대륙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예산읍에서 가야산~ 수덕사로 통하는 국도 45호선 중 덕산온천관광지구에서 약 1km쯤 떨어진 도로 양편에 우리의 자랑이자 충청인의 귀감인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 충의사(忠義祠)가 윤 의사 생가와 나란히 있다.

충의사

정부는 1963년 4월 29일 윤 의사 의거기념일을 맞아서 생가 부근에 기념관 충의사를 짓고 유품(보물 제568호)을 전시하고 있는데, 도로 오른편이 기념관 지역이고, 도로 왼편이 윤 의사의 생가 지역인데, 이 모두가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기념관 지역은 다시 본전과 기념관으로 세분되는데, 본전에는 홍살문을 비롯해서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등이 있고, 매년 의거 기념일인 4월29일에 윤 의사의 호를 딴 매헌문화제를 열고 윤 의사의 애국충정의 뜻을 되살리고 있다. 기념관에는 거사 직전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과 작별할 때 정표로 주고받은 회중시계, 당시 소지했던 중국 돈과 지갑, 도장, 안경집 그리고 일기책, 월진회 창립취지서, 상해에서 보낸 편지 4통, 형틀대 등 총 30종 56점이 전시되고 있다.
한편, 도로 왼편에는 윤 의사의 생가가 있는데, 이곳에는 윤 의사의 생가 광현당(光顯堂)과 4살 때인 1911년 봄부터 1930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던 저한당(抯韓堂)이 있다.

윤봉길 의사 동상(왼쪽)과 생가 전경.
도로변에 있는 저한당에는 의거기념탑과 두루마기를 입은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저한당에서 작은 개울을 건너 도로로 3분 거리에 생가가 있다. 광현당은 사방으로 물이 흐르는 가운데에 집터가 있어서 윤 의사가 생전에 이곳을 도중도(島中島)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도중도란 '한반도의 가운데 섬'이라는 뜻이어서 실제로는 섬이 아니지만 윤 의사 스스로 자신이 태어난 집을 한반도의 중심지로 여기고 웅지를 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1908년 6월 21일(음 5월23일) 이곳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파평 윤씨 윤황(尹璜)의 5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봉길의 어릴 적 이름은 우의(偶儀)라고 하는데, 그는 1913년부터 큰아버지 경(坰)에게 천자문을 배우다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벌어진 3·1운동을 보고 식민지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했다.
1920년에는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최병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그 다음해에는 성주록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을 공부했다.
이후에는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며 농촌개혁에 눈을 떠서 1928년 증산운동·부업장려 및 생활개선을 통해서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부흥원을 조직하는 한편, 청소년들의 심신 단련을 위한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를 설립하고, 1929년에는 상부상조를 위한 위친계를 조직했다.
또, 월진회(月進會)라는 계몽단체를 만들어 회장이 되어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에 주력했는데, 1928년 대한독립군단의 특수공작원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이던 이흑룡으로부터 국외의 독립운동전선의 형세를 전해 듣는 한편, 1929년 2월 부흥원 낙성을 기념하는 학예회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비난하는 풍자극으로 덕산주재소에 호출당하는 등 감시대상이 되었다.

기념관 전시물(왼쪽)과 충의사적비.
윤봉길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에 큰 충격을 받고 이듬해인 1930년 3월 23살의 나이로 가족도 모르게 집을 떠났다.
당시 ‘사내대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아야 한다(丈夫出家生不還)’는 비장한 각오를 적은 편지 한 장만을 남겨서 윤 의사의 처절한 조국애를 실감하게 하는데, 중국으로 가던 윤봉길은 평안도 선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달포 가량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를 두루 살펴보다가 1930년 12월 칭다오(靑島)에 정착해서 이듬해 여름까지 낮에는 교포 세탁소의 회계원으로, 밤에는 야간노동강습회에서 활동했으나, 1931년 7월 일본이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 구실로 일으킨 완바오 산 사건(萬寶山事件)을 보고 8월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서 애국지사 모임인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이윽고 이듬해인 1932년 4월 29일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계획아래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상해 훙거우 공원에서 상해사변의 승리를 자축하는 일본의 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했다.
이때 폭탄은 중국군 대령으로 있던 김홍일이 준비해주었다고 하는데, 윤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 상하이 파견군사령관 시리카와(白川儀則) 대장과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가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공사 시게마쓰(重光葵), 총영사 무라이(村井) 등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그해 5월 25일 상해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1월 20일 일본 오사카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가 12월 19일 25살의 젊은 나이로 총살됐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지자, 애국지사들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여의치 못함을 알고 일제의 간섭과 통제가 덜한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하이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하지만, 1932년 1월 일본 동경에서 이봉창 의사가 일본 천황에게 폭탄 투척에 실패하고, 4월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까지 임시정부는 외국정부의 아무런 주목이나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였으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국민당 정부 장제스 주석은 거대한 중국대륙의 백만 대군이 이루지 못한 것을 해냈다고 극찬하며, 임시정부에 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초대대통령 이승만도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주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선언문에 이것을 명문화시키는 작업에 큰 공헌을 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장제스 주석에게 끼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윤 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은 중국인들에게도 귀감이 되어 의거 현장인 상하이 훙거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 기념관 매정(梅亭)이 건립되었다.
일본 땅에 묻혔던 윤 의사는 해방 직후인 1946년 김구 선생의 요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6월30일 첫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윤 의사 기념관은 이곳 충의사 이외에 의거 55주년을 맞아 1987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국민의 성금을 모아서 세운 ‘매헌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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