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숙 시인·한남대 강사

 

하얀 칼라 검정교복의 내 사춘기는
보문산 자락에서 자라고 웃자랐다
지리책과 역사책 속 어떤 산도 산맥도
보문산 보다는 높을 수가 없었다
계룡산 지리산 백두 소백 한라산에서부터
몽블랑 히말라야 우랄산맥 록키산맥…도
보문산 뒤에서야 줄 서서 기다렸다
목척다리 건너다가 내려다보면
금강 낙동강 대동강 압록 두만강
유프라데스 간지스 황하 볼가강 미시시피도
세느 다뉴브 데임스는 물론 나일과 요단강마저도
목척다리 밑으로 흘러와서 흘러갔다
지리책 역사책의 고대 현대 미래도
목척 다리를 지나야만 문명을 일구었다
들국화 흐드러지게 피는 보문산 바위틈과
목척교 물가에서 반짝이는 조약돌밭이
오대양 육대주로 뻗치는 아늑한 꿈자리였다
더 큰 세상 더 큰 세계로
가라 넘어가라 흘러가라 부추겨댔다

내일 밤 꿈속에서도 보문산 소풍길과
목척교 다리 위에 선
까망 단발머리 여학생이 보일게다.
 

 

김지숙 시인(한남대 강사)

이 세상 무엇이 나를 키웠나. 무엇이 나를 자라게 했나. 꿈꾸게 했나. 금강으로 흘러가게 하였나. 나를 둘러싼 보문산 봉우리가, 그곳에서 불어오는 푸른 바람이, 산새 소리가, 지리책 한 쪽을 채우는 알프스산맥보다 더 크고 히말라야산맥보다 더 높다는 걸 나는 알았지. 산을 오르면 발끝부터 이마까지 차오르던 초록빛.

그 빛이 뿜어내는 경쾌함으로 자라는 까망 단발머리가 있어. 그 시절, 자주 목척다리 건너면 내려다보이던 작은 물결들. 그 때 흐르는 것들은 무엇을 속삭였나. 내게 어떤 말을 하고 있었나. 거기 물결 따라 이야기 따라 반짝이는 조약돌 따라 둥글게 둥글게 잠이 들면 가라, 흘러가라, 속삭이는 것들. 꿈꾸는 것들.

목척다리 아래 작은 물결이 금강이 되고 낙동강 두만강 미시시피강이 된다는 걸 나는 알았지. 더 큰 세상, 더 큰 세계로 이어진다는 걸. 거기 검정 교복 사춘기 소녀에게 속삭이는 것들이 알려 주었지. 내게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흘러도 목척다리 아래 지나 금강에 닿아서야 더 큰 꿈으로 탈바꿈한다는 걸 그때 알았지. <김지숙 시인·한남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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