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의 속리산(1058m)에서 뻗어 나온 금북정맥이 충청남도를 다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가르는 가야산(伽倻山; 678m)은 백제시대에는 상왕산(象王山)이라고 불렀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이곳에 가야사를 짓고, 가야산으로 고쳤다고 한다.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이름인 가야산 동·서·남·북에는 가야사를 비롯해서 수덕사, 천장사, 보원사, 개심사 등 1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정작 지명변경의 원천이 되었던 가야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불분명하고, 다만 조선 말 정권욕에 사로잡힌 대원군에 의해서 불태워졌다가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묘(南延君墓; 충남도기념물 제80호)를 이장한 사실만 기억되고 있다(2012.04.11. 가야산과 남연군묘 참조).

가야산 너머 서쪽 태안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대륙과 가까워서 삼국시대 이래 나라 중국 역대왕조와의 공식적인 교류 이전부터 고기 잡던 어부들이 태풍이나 풍랑으로 두 나라 바닷가에 표류하거나 기착하고, 문물교류가 활발했던 발자취가 많은데, 특히 삼국시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태안반도의 태화산 중턱의 태안 마애삼존불(국보 제355호), 서산 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 예산 봉산면 4면석불(보물 제794호) 등이 있지만, 백제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 마애삼존불은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안고 있다(2011.05.11. 충청도 절구경하기(Ⅰ) 참조).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석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지난 1965년 풍화방지를 위해 설치한 보호각을 걷어내고 2007년 일반에게 공개됐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계곡의 자연암반에 새긴 서산 마애삼존불은 당진~서산간 국도 32호선 중 두 도시의 경계인 역천을 지난 운산면 소재지에서 왼편의 지방도로 들어서 금세 오른쪽 개심사와 해미로 가고, 왼편으로 15만 당진시민의 상수원인 고풍저수지 가는 갈림길에서 왼쪽 고풍저수지 길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을 빠져나와 해미읍성을 안고 지방도로를 달려서 이 갈림길을 골라도 되고, 또 예산 덕산온천에서도 고풍저수지 길을 찾아도 된다.
사실 용현계곡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로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오는 관광지이어서 서산 시내에서 시내버스가 다니는데, 버스종점에서 왼편으로 흐르는 개울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서 약 5분정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마애삼존석불을 볼 수 있다.

원래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라서 1500여 년 동안 아무런 상징물도 없이 숭배되어 왔지만, 4세기 초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북부지방을 점령한 이후 그리스 영향으로 불상이 조각되기 시작한 이후 중국대륙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까지 전파되었기 때문에 부처의 형상이 정확할리는 만무하다.
삼존불상은 6~7세기경 중국, 일본, 한국에 크게 유행된 양식이지만,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왼편에 보주를 들고 서있고, 오른편에 앉아있는 반가사유상으로 그려진 것은 중국, 일본은 물론 고구려나 신라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렇게 변형된 삼존불상은 태안읍 뒷산 백화산에도 있는데, 태안 마애삼존불은 중앙의 부처님은 아주 작게 새긴 반면에 양편의 미륵보살상을 크게 새겨서 삼존불의 제작기법이 충청도 서해안지방에 토착화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011.05.18. 충청도 절 구경하기(Ⅱ) 참조).

삼존불 올라가는 길(왼쪽)과 서산마애삼존불이문(오른쪽).

아무튼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서산 마애삼존불은 이곳에서 1㎞쯤 계곡으로 더 들어간 보원사지(普願寺址; 사적 제316호)를 발견하면서 얻은 보물로서 1959년 4월 당시 보원사지 발굴조사를 나왔던 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이 주변에 또 다른 불교유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주민들에게 수소문했을 때, 마을노인이 ‘부처는 아니고 한 남자가 양쪽에 첩을 하나씩 거느린 그림은 있다’고 해서 찾은 것이 마애삼존불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마을 주민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던 두툼하고 둥근 얼굴에 평화롭게 미소 짓는 부처의 모습은 아마도 당시 바위에 부처를 새긴 백제인의 모습과 같을 것이라며,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만난 신라인의 ‘천년의 미소’와 대비해서 ‘백제의 미소’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으나,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이후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보호한답시고 바위에 구멍을 내고 대목을 잇댄 보호각 안에 가둬두었다.
참배객이 올 때마다 밝아진 전깃불에 눈이 부신 듯 웃고 있던 삼존불상은 세간의 비난여론이 높아지자, 43년만인 2007년 12월 보호각을 헐어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탑문대사 보승탑과 탑비(왼쪽). 보원사지 당간.

용현계곡을 약 1㎞쯤 들어간 곳에 있는 보원사지는 백제 말기인 무왕 원년(600)에 창건되어 1000여 명의 승려와 크고 작은 암자가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지로 있다가 최근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고려 말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의상전)에 의하면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 대사가 전국에 화엄 10찰을 세웠다고 하며, 원주의 비마라사·가야산의 해인사·계룡산의 갑사·비슬산(경북 달성)의 옥천사(玉泉寺)·부산 금정산의 범어사·남악(南岳; 구례 지리산)의 화엄사 등 6개 사찰의 이름만 기록했으나, 이보다 앞선 통일신라 말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가야산의 보원사를 화엄 10찰의 하나라고 하여 보원사가 중국대륙과 교통로인 태안반도에 위치한 대사찰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보원사지 발굴당시 출토된 금동불입상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지에는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오른편 산기슭에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 5층 석탑(보물 제104호)이 있고, 계곡 건너에는 보원사지 주지였다가 국사가 되었던 법인국사 탄문(法印國師 坦文; 900~975)의 부도(보물 제105호)와 석비(보물 제106호)가 있다.

보원사지 5층석탑(왼쪽)과 보원사지 발굴현장.

부도와 석비의 주인공 탄문은 고려 경종 때 왕사와 국사를 역임한 화엄종의 고승으로서 그는 신라 말인 효공왕 4년(900) 8월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서 5살 때 출가했다고 하는데, 속성이 고씨(高氏)이고, 자를 대오(大悟)라고 한다.
보원사 주지로 있던 탄문의 명성이 개성까지 알려져서 태조의 왕사가 되었으며, 그가 왕비 유씨(劉氏)의 임신을 빌어서 태어난 왕자가 4대 광종이라고 한다.
탄문 대사는 태조 사후 개성 부근의 귀법사에 머물면서 2대 혜종·3대 정종·4대 광종을 보필했는데, 광종 19년(968) 삼중대사(三中大師)의 승직을 받고 왕사가 되었다가 광종 26년(975) 3월 혜거(惠居) 국사의 뒤를 이어 국사가 되었다. 그 후 고령으로 국사에서 물러난 뒤 보원사 주지로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임금은 화엄종 최고지위인 별대덕(別大德)이란 칭호를 주었으며, 3년 뒤인 978년 5대 경종은 시호를 법인(法仁), 탑묘를 보승(寶乘)이라 추증했다.

아직까지 서해바다가 보이는 상왕산 서쪽 기슭의 보원사를 짓게 된 기원이며,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와의 관계도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수덕사와 보원사 그리고 가야산 너머 남쪽의 개심사 등은 내포지방의 명산인 상왕산 동서남북에 자리 잡은 형과 아우 절이 아니었을까?
다만, 2005년부터 서산시에서 보원사지 개발에 나섰지만, 사찰 측에서 시의 독단적인 개발계획에 반대하는 갈등으로 복원공사가 지지부진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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