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존 잘 된 조선 3대 읍성 중 하나 태종 18년 ~ 서종 22년간 중소돼

일제강점기까지 군사 요충지 역할 동학혁명군·천주교신자 처형지로

해미읍성.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사적 제116호)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조선시대 3대 읍성(邑城) 중 하나이다.
전국에는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의 산성과 나성(羅城)이 즐비하지만, 이처럼 작은 읍성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수많은 전란을 겪은 때문이라고는 해도 우리가 주변의 역사문화의 보존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해미읍성이 지척인데, 이곳은 서산~홍성간 국도 39호선 중 서산 시내에서 약10km정도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서산시에 속하는 작은 면에 불과한 해미이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해미는 국방 못지않게 서해바다의 안면도를 우회하는 조운선을 지키는 길목에 설치한 군사도시였다. 특히 고려 말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와 중국의 홍건적이 충청도 서해안 지방을 자주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조정에서는 이를 막기 위해 조운선이 항해하기에 가장 힘든 길목인 안면도 부근인 해미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해미읍성 동현입구(왼쪽)과 무과 훈련장.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충청감사가 머무는 공주목과 홍주목 덕산현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을 설치하고 충청감사가 겸임하도록 했는데, 태종 16년(1416)에는 덕산현에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해미현으로 옮긴 뒤 충청좌수영이라고 하였다.
원래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를 심어서 탱자성(枳城)이라고 불렀던 해미읍성은 원래 성 밖까지 큰 배가 드나드는 해변이었다고 하는데, 태종 18년(1418)부터 세종 2년(1420)까지 3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성종 22년(1491)에 중수했다.

그 사실은 읍성의 정문격인 진남루의 홍예문 위에 "황명홍사4년 신해년"이라고 쓰인 명나라 홍무제의 연호에서 잘 알 수 있는데, 당시 해미읍성에는 850여 명의 군사가 주둔했다고 한다.
충청도의 군사지휘소로서 왜구의 침입방지는 물론 내란, 포호(捕虎) 등의 임무도 맡고 있던 해미읍성은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을 거치면서 진관체제가 큰 비판을 받으면서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옮기고, 효종 2년(1651)에 절도사영을 청주로 옮기게 되면서 해미는 230여 년간의 절도사영 역할이 끝나고 읍성의 역할이 시작되었다.

성웅 이순신 장군도 선조 13년(1579) 7월 전라도 발포(鉢浦) 수군만호로 승진하여 갈 때까지 1578년 10월부터 약10개월 간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로 근무하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효종 2년(1651)이후 호서좌영이 설치되고, 무장이 현감인 겸영장(兼營將)이 내포 지방 12개 군·현의 병권을 관장했다.
해미 현감은 일제강점이 시작되던 1914년까지 호서좌영을 겸직하며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했는데, 당시 군사가 주둔하던 지역에서는 죄수들의 처형권도 가져서 조선 말 동학농민혁명의 혁명군을 비롯하여 항일의병, 특히 조정에서 금지한 서학을 믿는 천주교신자들을 처형한 처형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해미읍성 호야나무(왼쪽)과 해미읍성 내 감옥.
아무튼 중종 25년(1530) 이행, 윤은보 등이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충청절도사영은 해미현 동쪽 3리에 있으며, 둘레 3172척, 높이 15척의 성 안에는 3개의 우물과 군창이 있으며, 성 밖에는 성과 약8m쯤 간격을 두고 위 넓이가 10~11m, 아래넓이 5m, 깊이 1.4~2.4m 규모의 해자를 팠다고 하지만, 현재 해자는 북쪽에만 일부 남아 있다.

그 후 영조 때 전국의 읍 규모를 소개한 여지도서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6630척, 높이 13척, 치성(雉城) 382첩, 옹성 2곳, 북문은 암문 형식으로 문루가 없고, 동문(岑陽縷), 서문(枳城樓), 남문(鎭南樓) 등 3개의 성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조선후기에 이르러 해미읍성의 규모가 훨씬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학혁명 등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어 동·서문의 누각은 없어졌고, 일제강점기에는 그나마 관아는 면사무소로, 객사는 초등학교로 바뀌고, 그밖에 우체국이며 160여 채의 민가가 들어서기도 했는데, 1960년 해미읍성 보존을 위하여 사적지로 지정했다. 1974년부터 성안의 민가를 철거하고, 동문·서문을 비롯하여 5m 높이의 성곽 둘레 1800m를 복원했으며, 1981년부터는 성 안의 발굴조사와 함께 성안 복원공사에 나섰다.

약6만여 평의 대지에 둘레 1.5㎞, 높이 4∼5m 석성으로 복원된 해미읍성의 정문격인 진남루를 들어서면 수령이 집무하던 동헌으로 통하는 큰 길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동헌은 읍성과 구분된 별도로 문과 담장이 있는 공간이다.
관아로 향하는 길 양편 넓은 공터에는 옛 시설이 하나씩 복원되고 있는데, 특히 길 오른편에 수령 300년으로 추정하는 회화나무(충남도기념물 제172호)는 수많은 나무들 중에서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해미성지(왼쪽)과 순교탑.
이곳은 조선 말 국법으로 금지한 천주교를 믿던 신자들을 가뒀다가 처형한 감옥 터가 있던 곳으로서 당시 체포한 신자들이 넘쳐서 감옥에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이곳에 묶기도 하고, 또 고문장소로 삼았다고 한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 내포지역의 천주교신자 1000여 명을 체포하여 고문과 처형한 회화나무에는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서 고문을 하였으며, 당시 그들을 묶었던 못과 철사토막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케 한다.

몇 년 전 회화나무 옆에 소규모로나마 당시의 감옥을 복원했지만, 마치 촬영세트장처럼 조잡한 것이 아쉽다. 그밖에 길 왼편에 조선시대의 민가 3채를 재현한 민속 가옥과 국궁 체험장, 우물,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 등을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해미읍성 주변에 야간 경관조명을 설치해서 낮과 다른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이처럼 가족단위 관광지이자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역사 체험장이고, 천주교신자들에게는 성지순례지인 해미읍성은 우리 역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한편, 해미읍성 서문 밖에 있는 해미중학교를 지나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병인년(1866)~무진년(1868)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수십 명씩 생매장한 ‘여숫골’이 있다.

여숫골이란 당시 생매장 당하기 직전의 천주교신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서 '예수 마리아' 를 외치는 모습이 마치 '여수(여우의 충청도 사투리)에 홀려서 죽는 것 같다' 는 사형집행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여숫골이라고 불렸다고 하고, 특히 '진둠벙'은 죄수를 뜻하는 ‘죄인’과 웅덩이를 의미하는 충청도사투리 ‘둠벙’이 합쳐진 말로서 죄수들을 꽁꽁 묶어서 물속에 수장시킨 처형장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95년 천주교에서는 진둠벙 맞은편에 생매장된 무명 천주교신자들을 기리는 순교자 묘와 함께 16m 높이의 순교 탑을 세우고, 당진 솔뫼성지, 서울 마포의 절두산, 경기도 안성의 미리내, 광주의 천진암,충북 제천의 베론 성지 등과 함께 천주교신자들의 성지순례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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