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준 사회부장

[금강일보 이기준 기자] 우리 사회는 압축성장의 시대를 거치며 많은 것을 잃었다. ‘가난에서 벗어나자’라는 목표를 향해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면서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 아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학습됐다. 소(小)의 문제제기는 사회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됐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경제의 파이는 커졌지만 그 이면에 가려진 희생들은 억눌려 있다 이제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회양극화의 문제, 노동환경의 문제, 인권의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건너 뛴 부작용이 누적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매년 반복되는 최저임금 줄다리기 역시 마찬가지다. 미뤄왔던 숙제가 쌓이고 쌓여 이젠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최저임금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시대에 맞게 바꿀 것인지,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운영상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최저임금 결정 구조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했는데 지난 20대 국회에선 논의가 공전만 거듭하다 곁가지 일부만 건드리고 상정된 법안들을 모두 덮었다.

2017년은 우리나라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촛불혁명 정권이 들어선 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항쟁이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면 촛불혁명은 ‘민주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깨웠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세상을 지배해 온 기득권에 의해 억눌려 온 ‘민주적 시민의식’이 깨어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도 이전에 비해 훨씬 넓어졌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아니라 국민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한 거다.

2018년은 ‘미투운동’이 뜨겁게 우리 사회를 달군 해다. 정권에 기대 기득권을 구축해온 검찰에서 ‘미투’ 폭로가 나왔고 이후 문화예술계, 교육계, 정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로가 이어졌다. 인권에 대한 높아진 국민적 감수성에서 힘을 얻어 용기를 낸 피해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큰 고통을 받게 되는 사회구조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 벌어진 거다.

‘미투운동’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법원의 성찰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8년 4월 대법원은 학생을 성희롱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대학교수가 낸 해임결정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법원이 성희롱 관련 소송 심리를 할 때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에 길들여져 무뎌진 성(性)에 대한 감수성을 깨운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2019년 시작된 코로나19는 2020년을 지배하고 있다. 감염병에 대한 대응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건데 이 위기를 넘기더라도 향후 바이러스 감염병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사회를 혼란을 야기할 것이란 예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같은 경고에 정부·지자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비하는 데 있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감염병 대응조직을 강화하는 게 첫째인데 근본적으로 ‘환경·생태 감수성’을 높이는 것도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감염병 역시 기후위기에서 비롯된다는 문제제기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인간사회와 자연생태의 밸런스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회피할 경우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우리 사회에 ‘생태 감수성’이 주요 키워드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소독제를 바르고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부터 감염병 대응이 시작되듯 쓰레기를 줄이려는 작은 노력에서부터 생태 감수성을 깨우려는 노력이 시작되지 않으면 손소독제·마스크만으로는 안 되는 더 강력한 감염병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간 다수 의견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수 의견이 되면 불편해지는 기득권의 논리로 인해 무시된 다양한 감수성들이 깨어나고 있다. 새로 시작된 제21대 국회, 준비는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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