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신사 요사채
스가와라노 기념관
보물관
본전 뒤편 애마들

후쿠오카현청 소재지로서 51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일본 제8위의 대도시이자 ‘규슈의 수도’인 후쿠오카는 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나카가와(那珂川)를 중심으로 바닷가인 동쪽은 상업지역인 하카타시, 서쪽은 후쿠오카시로 각각 별개의 도시로 발전해왔다.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89년 후쿠오카시로 통합되었으나, 규슈지방의 역사와 유적을 보존하고 있는 고대도시는 헤이안 시대인 7세기부터 규슈 전역을 통치하던 다자이후(太宰府) 시이다. 

당시 지쿠젠국(筑前国)이 규슈지방을 다스렸다고 하지만, 사실 오늘날의 다자이후 시와 지쿠시노시(筑紫野市) 지역에만 통치권이 미쳤을 뿐인데 그 지방관청이 다자이후에 있는 것이다. 후쿠오카에서 다자이후까지는 자동차로 약 40분 거리이고, 대중교통은 하카타역 버스터미널 11번 정류장에서 다자이후행 직행버스를 타면 40분 거리이다. 또, 니시테츠 후쿠오카 톈진역(西鉄福岡)에서 다자이후행 열차를 타거나 하카타역 앞 A정류장에서 톈진행 버스를 탄 뒤 톈진의 니시테츠 후쿠오카역에서 니시테츠 다자이후행 사철을 갈아타면 30분 정도 걸린다. 나와 아들은 미리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서 후쿠오카에서 예약한 렌터카 회사에서 휘발유와 전기겸용 렌터카를 빌려서 타고 다녔다. 

다자이후에는 도부루터(都府楼跡 또는 大宰府政庁跡)의 문지(門址)와 회랑 터, 미즈키성, 오도조성 유적지와 사찰 간저온지, 지쿠젠고쿠분지 등이 있지만, 가장 인기 코스는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를 모신 다자이후 덴만구(大宰府天滿宮) 신사이다. 

헤이안 시대인 899년 학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조정의 우대신이 되었는데, 고지식한 그에게는 정적이 많았다. 특히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일파는 미치자네가 천황을 폐위시키려고 한다고 모함하자, 평소 미치자네를 껄끄러워했던 다이고 천황은 그를 다자이후로 좌천시켰다. 당시 율령제는 귀족에게 형벌을 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유배와 다를 바 없었다. 

본전 옆 고신규
텐만구 본전
본전
도비우메(매화나무)

그런데, 미치자네가 오늘날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그의 사후에 잇달아 큰 재앙을 가져온 원혼의 위력(?) 때문이었다. 미치자네는 다자이후로 좌천된 후 2년 만에 죽었는데, 그가 죽은 이듬해 교토에서 홍수와 역병이 발생했다. 또, 그 이듬해에는 혜성이 출연하는 등 잇달아 재앙이 일어났고, 909년에는 홍수와 역병이 창궐하고 그를 축출했던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죽었다. 912년 교토 대화재, 913년 가뭄과 폭우, 915년 천연두의 창궐, 917년 대기근, 923년 도키히라의 여동생 소생인 야스아키라 황태자의 급사 등 재난이 잇따르자, 사람들 사이에선 미치자네의 원혼 때문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결국, 다이고 천황은 야스아키라 황태자가 죽은 지 한 달 만에 미치자네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정2품의 관위를 내렸다. 그러나 그 후에도 가뭄과 낙뢰, 다이고 천황의 병환 등 재앙은 계속되자 조정에서는 스가와라노가 죽은 지 16년 뒤인 919년 다자이후에 덴만구 신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것이 신사(神社)의 기원이 되었다. 

다자이후 역에서 신사까지는 도보로 약 15분 거리인데, 역 앞 네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덴만구 신사로 가는 골목이다. 다자이후 신사까지 약 200m쯤 되는 골목 양쪽에는 일본 어느 신사나 사찰 입구처럼 잘 다듬은 돌로 포장했고, 길 양쪽에는 기념품 가게와 카페, 맛집이 즐비하다. 이곳에서는 매화꽃 모양의 떡(うめかえの もち)’이 특히 인기인데,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신사 입구에는 도리이(鳥尾)가 잇달아 세워져 있다. 도리이를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전령사라고 믿는 일본에서는 우리의 전통신앙이던 솟대 기능을 하는데, 삼한 시대에 솟대는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기원하는 염원에서 주로 마을 입구에 세우다가 점점 성스러운 곳에도 세우게 되었다. 이런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하며, 범죄자들이 소도로 피신하면 붙잡지 못할 정도로 성역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중국 후한서(後漢書)·진수의 삼국지 위지 조선전·진서(晉書)·두우의 통전(通典)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도리이는 고구려인들의 믿음이던 태양에 사는 발 셋이 달린 삼족오(三足烏)의 변형이라는 설도 있다.(신사에 관하여는 5월 20일 자 도쿄 아사쿠사 참조) 

하사쿠
누문
연못과 다이코바시
다이코바시에서 본 누문

텐만구 신사는 입장료가 없다. 다만, 경내에 있는 일본 국보 등을 전시하는 호모쓰덴(寶物館)과 본전 뒤에 스가와라노의 일생을 하카타 인형으로 전시하고 있는 스가와라노 기념관을 입장하려면, 각각 300엔, 2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신사 입구에는 좌대 위에 큼지막한 황소 고신규(御神牛)상이 앉아있는데, 고신규는 스가와라노가 죽은 후 그의 시체를 옮기던 소가 이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멈추자 그곳에 신사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텐만구 신사에는 모두 11개의 고신규가 있어서 스가와라노의 시체를 옮기다가 주저앉았다는 황소의 위치가 어느 곳인지 약간 애매하다. 아마도 본전 앞 우측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미치자네를 모신 덴만구 신사에서 고신규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황소의 머리는 참배객들의 손길로 반질반질하게 빛이 난다. 

고신규상 앞에서 왼쪽이 신사로 가는 길이고, 직진하면 음식점 거리를 거쳐 규슈국립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연못 심우지(心宇池) 위에 놓은 다리 다이코바시(太鼓橋)는 신사 특유의 붉은색을 칠했는데, 아리랑 고개처럼 완만한 경사가 세 번 굽어져 설계된 것이 매우 낭만적이다. 이 다리 위에서 돌아보는 연못과 신사, 도리이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서 텐만구 신사의 포토존이다.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본전 입구임을 알리는 돌로 만든 큼지막한 도리이가 또 있고, 주변은 온통 수백 년을 살아왔음 직한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 도리이를 지나면 왼편에는 신사마다 참배하기 전에 손을 씻는 히사쿠(久キュ)가 있고, 도리이 오른쪽에는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온 스가와라노를 찾아 ‘날아왔다’고 하는 커다란 매화나무 도비우메(飛梅)가 있다. 다자이후의 경내에는 약 6000그루의 홍백, 매화가 있어서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마치 매화밭에 온 착각을 느끼게 하며, 그밖에도 약 40종 3만 포기의 창포 등 계절마다 다양한 꽃을 즐길 수 있다. 

‘봄바람이 불거든 향기를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도 봄을 잊지 말게나.’ 

스가와라노가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올 때, 이런 시를 읊었다고 하는데, 그 매화나무가 하루아침에 교토에서 다자이후까지 날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사에서는 본전 오른쪽의 매화나무 ‘도비우메’가 가장 인기이다. 덴만구의 도비우메는 일본 전 지역에서 가장 먼저 꽃피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또 매년 2~3월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 마치 우리네 순천 선암사 매화와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를 보러 가는 사람들처럼…. 

다이코바시
신사골목의 맛집
신사골목의 스타벅스
입구 도리이

도리이가 우리네 사찰의 일주문 격이라고 한다면, 도리이를 지나 붉은 칠을 한 2층 누문은 신사 본전으로 들어가는 금강문쯤 된다. 스가와라노를 모신 본전은 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덴만구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본전은 1591년 세워졌으며,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전 오른쪽에는 위패를 모신 여섯 개의 자그마한 목조 비각이 고즈넉하다. 본전 담장 왼편으로 고목이 있는 바깥 건물은 신사의 사무소와 향전(香殿) 건물이 상당히 길게 지어졌다. 신사 오른쪽 약간 높은 위치에 국보 등을 전시하고 있는 보물전이 있다. 다자이후 덴만구는 매년 입시철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합격을 기원하거나 취업을 바라는 참배자들이 모여들어 참배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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