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새겨진 6·25 70주년
전쟁 상처 간직한 노병들
애꿎은 민간인 희생자의 넋

[금강일보 박정환 기자] 1950년 6월 25일 민족상잔의 비극이 빚어진 그날로부터 꼬박 70년이 흘렀다. 전쟁의 기록은 역사책에 박제돼 있는지 모르지만 70년이 지나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상흔은 아직도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물론 누군가의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활기찬 여름이 움트는 6월지만 해마다 이맘 때면 우리들 가슴에 엄숙한 그 무엇인가가 물결처럼 일렁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겪은 세대보다 훨씬 많은 시점에서 ‘잊지 말자 6·25’는 어찌보면 시대에 동떨어진 표어일지 모른다. 그러나 엄연히 현실이다. 전쟁이 종전이 아닌 휴전이라는 애매한 결론으로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 후유증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이 함부로 ‘따따부따’할 만한 성격이 못 된다. 죽음의 공포를 헤쳐 나온 참전용사와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마음 속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 70년 전의 전쟁을 잊지말아야 할 가장 선명한 증거들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경 ‘폭풍’이라는 남침 개시 전문을 송신한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된 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정전 협정이 조인되기까지 3년 여 동안 참전 병력은 국군 포함 UN군 170여 만 명, 공산군 215만여 명 이상이다. 냉전(cold war) 초반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유일무이하게 열전(hot war)을 펼친 사례로 꼽힐 정도로 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이중 한국군과 미군, UN군을 합쳐 30여 만명, 공산군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포함해 약 60만여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사상자는 더욱 참혹하다. 남북한 지역 민간인 사상자와 행방불명자의 합은 358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집계됐다. 피붙이와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1000만 명 이상 발생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50년 당시 한반도 인구가 2000~300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쟁으로 인해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몸소 참혹한 전쟁을 치른 6.25 참전유공자들의 기억 속 6.25는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1946년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한 이후 대한민국 육군으로 산하를 누볐던 청춘, 인천상륙작전의 첨병 역할을 했던 해병대원, 군번줄 하나 없이 펜 대신 총을 잡고 전장으로 나갔던 학도병 등 전란 중 많은 이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다. 살아남은 자, 그들의 가슴에는 수류탄 파편이 박혀 있고, 전우의 마지막이 남아 있으며 시대의 통증이 도사리고 있다.

동족끼리 총뿌리를 겨눈 전쟁은 죄 없는 숱한 민간인의 희생을 볼모로 삼았다. 보도연맹 사건과 좌우익 대립, 군사작전에 의한 희생 등 많은 이들이 이름 모를 산기슭에 묻혔다. 대전 산내는 그 곳 중 하나다.

대전근현대사전시관 관계자는 “6.25 전쟁의 여파는 한국 현대사에서 8할을 차지할 만큼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동족 간 많은 인명피해를 냈으며 남북한 사이에 이념 경쟁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면서 “휴전이라는 불안정한 정세 속에 군사적인 대결 구도가 장기화 된 만큼 세계 정세를 면밀히 분석해 갈등을 해결하는 게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환 기자 pjh@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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