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일 정치부장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 현직 광역단체장이었던 2017년 10월 서울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여성지방의원 워크숍에 나란히 참석한 모습. 연합뉴스

[금강일보 최일 기자] 지난 5일 오후 박원순 서울시장은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 모친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안 전 지사가 일시 석방되기 전이었다. 즉 안 전 지사가 상복을 입고 상주 역할을 하기 하루 전날, 박 시장은 민선 5·6기에 광역단체장을 함께 지낸 안 전 지사와의 돈독한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광주지검이 모친상을 치를 수 있도록 형집행정지 신청을 한 안 전 지사에게 자유를 허용한 시간은 9일 오후 5시까지였다. 그런데 정확히 17분 후 박 시장이 실종됐다는 신고가 딸에 의해 112에 접수됐고, 이후 경찰과 소방당국의 수색 끝에 10일 오전 0시 1분 서울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박 시장은 숨진 채 발견됐다. 안 전 지사의 모친상이 치러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갔던 박 시장이 불과 닷새 후 ‘불귀(不歸)의 객(客)’이 돼 같은 곳에 시신으로 안치되라라곤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지만, 이것이 현실이 됐다.

한때 여권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꼽혔던 두 사람이 나란히 성(性) 문제로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그것도 매우 유사하게 자신을 밀착 수행해 온 여비서의 폭로,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물론 박 시장은 스스로 유명을 달리해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가 종결됨에 따라 안 전 지사와 같은 부류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순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10일 새벽 박 시장의 사망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왜 안 전 지사의 모친상에 조문을 하러 갔을까? 1000만 도시 서울시의 수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그가 상주(안 전 지사)도 없는 장례식장을 왜 직접 찾아갔을까?’

결과론이지만, 박 시장은 며칠 뒤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감하고 그곳을 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에 이르렀다. 서울시 내부적으론 이미 그의 성추행 폭로와 고소장 접수가 예견됐었고, 언론의 취재도 시작된 시점에 박 시장은 쓸쓸한 안 전 지사 모친의 장례식장을 찾아 복잡하고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려 한 것이 아닐까? 2018년 3월 안 전 지사가 하루아침에 파렴치범으로 전락해 국민적 지탄을 받았듯 자신 역시 며칠 뒤면 그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임을 직감하고, ‘권력 무상’을 절감한 채 발길을 돌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1980~90년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성폭력 사건(경기 부천경찰서 권인숙 씨 성고문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피해자를 변호해왔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며 ‘성 인지 감수성’을 강조해 온 그였기에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데 대한 허망함이 매우 컸을 것이다.

2011년 서울시장 취임 후 성평등정책·여성정책에 힘을 실어주며, 모든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추진한다는 목표로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고, 지난해 1월에는 성평등 문제 등에 관해 시장을 보좌하는 특별 직위로 ‘젠더(Gender) 특보’를 신설하기도 한 박 시장으로선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여성인권을 강조해 온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될 수 있다는 중압감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안 전 지사처럼 살아서 용서를 구하고 죄과의 대가를 치르면 되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박 시장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의 수도를 10년간 이끌어 온 정치인의 충격적이고 황망한 퇴장에 마음이 헛헛해진다.

안 전 지사의 재수감과 박 시장의 실종, 안 전 지사의 모친상과 박 시장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씁쓸한 2020년 7월, 친일 행적 논란을 빚는 백선엽 장군의 별세까지 겹치며 또 하나의 아이러니한 장면이 한국 정치사에 주홍글씨처럼 새겨졌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